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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내가 네 번째로 써낸 「시말서 혹은 반성문」역시 도깨비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정학 닷새째가 되는 금요일 아침,도깨비는 무슨 놈의 반성문에 반성하는 대목이 한군데도 없다고 방방 떴지만,솔직히 말해서 반성하는 게 어울릴만한 장면을 찾 아내기가 쉽지 않았다.어쨌거나 토요일 하루만 지나면 해방이었다.나를 거꾸로 매달아놔도 시계는 돌아갈 거였다.
나는 그동안 써니를 보지 못했다.
써니가 삐삐를 압수당한 뒤로는 안전하게 서로 접선할 수 있는길도 없었다.게다가 써니도 근신 중이라고 했으니까 여러가지가 용이치 않을 거였다.써니네집 전화번호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써니엄마가 전화를 받으면 무지 쪽 팔릴 거였다.
써니엄마와 나는 지난번에 거의 일대일의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폼을 흐트러뜨리지 않고,써니와 내 관계를 일단 유보하는데 합의한 셈이었으니까.나는 사정하거나 매달리지 않았으니까.이제 와서내가 써니엄마에게 그냥 걸었어요 어쩌구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렇다고 전화에서 써니엄마의 목소리가 나오면 얼른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그러고 나면 어쩐지 내가 아주 치사해지는 기분이 되니까.그런 건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집안 분위기도 썰렁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나 형에게 아무 말도 안하겠다고 그랬지만,어쩐지 집안분위기가 예전같지 않았다.그냥 모르는 척 하라고,어머니는 곧잘 내게도 그랬으니까.
정학기간 동안 나는 학원이 끝나는대로 집에 돌아와 다른 아이들의 노트를 베끼면서 학교의 수업진도를 따라가겠다고 한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적어도 어머니가 잠들기 전까지는 책상에 앉아 있고는 했다.엄마 들은 모르실거였다.단지 엄마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있는지.
식구들이 대강 잠들었다 싶으면 나는 살며시 거실로 나가 무선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들어와 책상머리에 갖다놓고는 했다.사람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전화기가 그냥 전화기가아니게 되는 법인가 보았다.전화기를 바라보고 있 으면 약간은 코맹맹이같은 그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러다 보면 여기저기 주근깨가 박힌 그애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거였다.
마침내 전화 벨이 울렸다.나는 이때를 위하여 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대기조처럼,전화 벨이 한번도 채 끝까지 울기 전에 수화기의 단추를 누르고 말했다.
-여보세요,달수네 집인데요….
-달수니.기다리는 전화가 있는 모양이야.안그래? 써니는 아니었다.웬 애새끼의 목소린데 금방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렇다고 누구냐고 묻는 것도 우리들의 예가 아니었다.
-열두 시가 다 돼가잖아.어른들이 받아서 좋을 건 없지.
-나 동우야.니가 직접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어때,지금 스포츠센터 앞으로 나와.내가 차 가지고 나갈게.한바퀴 돌고 오자구. -그래 넌지 알았어.
말해놓고,나는 잠시 궁리해보았다.식구들은 다 잠든 모양이었다.그리고 동우는 알아볼만한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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