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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택변천사>4.아파트시대-마포아파트 건설 對北과시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전후 북구사업이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신규건설사업자가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 1958년에는 전국에 건설업체가 1천6백여개에달했다고 한다.기술력이나 자본이 적은 건설업체가 난립함에 따라건설공사의 부실을 방지하기 위해 58년에 건설 업법이 제정됐다.부실공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당시 워낙 전쟁 이재민이 많아 이들이 아무데나 거적을 두르고대소변을 보아 위생환경이 불량하여 李承晩대통령은 공동주택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짧은 시간내에 많은 주택을 짓기 위하여 공동주택의 건설이필요하다는 얘기다.
58년 중앙산업주식회사가 종암동의 고려대옆에 5층짜리 17평형 아파트 1백52가구를 건설한 것이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다.이 아파트는 서양주택을 모방하여 넓은 거실에 벽난로를 설치한서구식 설계였다.수돗물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 하고 화장실은수세식이었다.이후에도 중앙산업은 충정로에,주택공사의 전신인 주택영단은 부산에 소규모 아파트를 건설했다.
61년 5.16이후 여러 부문에서 의욕적인 계획이 수립됐는데특히 주택문제의 해결없이는 경제발전은 물론 혁명과업의 완수에도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주택건설계획이 수립됐다.특히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은 당시 남한의 주거수준이 북한보다 열악했기 때문에 남한에도 서구식 아파트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아파트단지를 건설토록 주택공사에 지시하였다.
주택공사는 원래 마포형무소의 농장으로 사용했던 부지를 불하받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중산층을 위한 수세식 화장실.중앙난방방식.엘리베이터가 설치된 10층짜리 고층아파트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원조기구인 USOM측은 난민구호주택만 많이 짓는 것을 원했고 공사비가 비싼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건설은 반대하였다.또한 서울시 수도국은 마실 물도 귀한 판에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고 반대하였다.일부 언론에서는 전기사 정이 나쁜데엘리베이터가 무어냐,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중앙난방이무어냐 하는 식의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우여곡절끝에 당초의 10층에서 6층으로,난방방식은 연탄보일러로 변경하였고 화장실은 2백t짜리 지하저수조를 설치하는 조건으로 수세식 화장실로 낙착을 보았다.설계는 독일인 건축가가 맡았다. 62년 12월에는 전용면적 10~15평 규모의 임대아파트4백50가구의 입주가 시작됐으나 10%밖에 분양되지 않았다.아파트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고 또한 그당시 보통사람의 봉급이 1만원 정도,하숙비가 4천원 정도였는데 임대보증금이 4만원,월 임대료가 3천5백원으로 비쌌기 때문이다.
63년과 64년 초에는 분양아파트 1백92가구가 공급됐는데 역시 분양이 매우 저조했다.주택가격은 16평형이 62만원이었는데 융자금이 23만원이므로 실입주금은 39만원이었다.그러나 차차 영화감독 유현목,성악가 김자경,대학교수등 중류 계층이 입주함에 따라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됐다.64년 후반에는 프리미엄까지 붙게 되었다.
아파트가 인기를 얻게 되자 마포아파트를 소재와 배경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개념을 일반인에게 심어 준 것이다.
아파트의 효시인 종암아파트와 최고의 대규모 아파트단지인 마포아파트는 국민소득이 향상되고 더 넓고 편리한 주택을 선호하게 됨에 따라 90년초 모두 헐리고 고층아파트가 건설중이다.제1세대 아파트의 마감이다.
〈국토개발연구원 주택연구실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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