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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텔(일류의 현장 선진연구소에 가다: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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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초콜릿서 원폭까지” 돈되면 뭐든 개발/“연구비 확보·성과없으면 보따리 싸라”/혹독한 분위기가 상용화연구 선두 비결
「초콜릿부터 원자폭탄까지.」 바켈 기념연구소의 가장 큰 특징은 이 한줄로 요약된다. 초콜릿이든,원자폭탄이든 팔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만들어내는 잡식성(?) 연구소가 바로 바텔이다. 91년 걸프전이 한창일 때 사막의 미군들에게 폭발적으로 인기를 모았던 초콜릿이 있었다. 「허쉬 초콜릿」이라는,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의 이 초콜릿은 겉모양은 보통 초콜릿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보통 초콜릿이 수십초만 손에 쥐고 있었도 녹아 흘러내리는 것과는 달리이 「사막의 초콜릿」은 무려 섭씨 50도가 넘어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을 뿐더러 맛도 변함이 없었다. 바텔의 아이디어와 기술력이 이 초콜릿을 녹지 않도록 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40년대 중반 바텔에 극비의 연구를 맡긴 적이 있었다. 다름아닌 원자폭탄용 우라늄을 정련하고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바텔은 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냈고,결국 미국은 이 원자폭탄으로 일본에 결정타를 먹일 수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의 기술력을 인정받은 바텔은 50년대 초반 사설기관으로는 세계 최초로 원자력연구센터를 개설했다.
이외에도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은 유수한 개발성과가 바텔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상품의 이력서격인 「바코드」며,오타를 수정하는 「화이트」,「제록스」로 널리 알려진 복사기,자동차의 「크루즈컨트롤」 등 바텔이 세계처음 개발에 성공한 상품들은 밤새워 꼽아도 모자랄 정도로 많고도 다양하다.
바텔은 도대체 어떤 연구소 길래 성격이 이렇듯 천양지차인 연구를 척척 성공시킬 수 있었는가. 이 연구소 허프만 박사(상용개발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바텔의 연구원들은 생존능력에서 타연구소의 어느 연구진보다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적정한 연구비가 확보되지 않을 경우 언제라도 일을 그만둬야 하기 때문에 아주 치열한 자세로 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러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밖에요.』
모기업도,특별한 후원기관도 없는 바텔로서는 외부로부터 따내는 연구비가 연구소의 유일한 밥줄이다. 연구소장 올슨 박사의 말에 따르면 바텔의 연구원들은 연간 자기가 받는 연봉의 약 4배에 해당하는 연구비를 기업이나 국가로부터 따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번 연구과제는 현재 진행중인 연구과제가 끝나기 전에 확보돼야 한다. 차기 연구과제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 연구소측은 6개월의 유예기간을 준다. 이러고도 연구과제를 따오지 못하면 그때는 보따리를 싸야하는 곳이 바텔이다.
바텔이 오늘날 상용화연구에서 가장 앞서가는 연구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험난한 연구환경을 몸으로 극복해가면서 체득한 강인한 연구정신이 바탕이 됐다. 바텔에서는 80년대 초반 정부로부터 약속받은 원자력관련 수억달러짜리 연구과제가 의회에서 관련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는 바람에 이 연구에 매달렸던 1백여명의 연구원이 하루아침에 실직한 일도 있었다. 이외에 연구를 맡긴 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이를 갑자기 취소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아 연구원들은 항상 긴장감 속에서 일을 한다.
바텔의 연구원들은 이같은 연구분위기에 단련되면서 진짜 프로가 된다. 바텔에서는 학위나 학벌이 통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명함에 박사학위를 아예 박아넣지 않는 사람도 많다. 바코드를 개발한 폴 앤드루나 지구위치정보시스템(GPS)을 개발한 아트 슐츠도 모두 박사학위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텔에서 학위는 승진이나 급여에 아무런 영향을 마치지 못한다. 때문에 박사라고 목에 힘주고 다닌다면 바텔에서 이만한 꼴불견도 없다.
이같이 오로지 실력만이 통하는 혹독한 분위기 탓인지 바텔에는 한국인 과학자가 참 드물다. 이곳에 근무하는 3명의 한국인중 한 사람인 켄리 박사(한국명 이규원·환경과학)는 『바텔에서는 학위는 물론 직위도 실상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켄리 박사는 이곳에서의 직위는 연구리더로 우리 기업으로 치면 부장급쯤 되지만 몇몇 연구에서는 자기 부하의 지시(?)를 받고 있다. 바텔에서는 보통 외부기관으로부터 연구과제를 따온 사람이 그 연구에 관련해 모든 책임을 지기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연구과제별 책임자가 직위에 관계없이 직급상 위·아래 사람으로 마구 뒤섞여 있다. 켄리 박사는 『부서 직원이 따온 연구과제에서 부서장이 쫄병노릇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바텔내에 아무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타임체크」가 엄격한 것도 바텔의 특징이다. 그저 출퇴근 시간만 대충 적어내는 우리의 연구소와 바텔의 타임체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바텔의 연구원들은 16절지 한장으로 된 타임체크카드에 분단위로 자기가 한 일을 세분해 상세히 적도록 돼있다.
예컨대 「오전 9시∼10시45분:프로젝트 넘버2의 기본설계 검토,10시50분∼12시:프로젝트 넘버3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오후 1시∼1시30분:외부손님 ○○씨 접대…」라는 식으로 꼼꼼히 근무일지를 작성한다. 이같은 타임체크는 상사가 별도로 체크한 근무시간과 나중에 대조하게 돼있다.
바텔에서는 「연구를 기막히게 잘하든지」,아니면 「외부에서 연구거리를 잘 물어오는」 둘중의 한가지 재주라도 없으면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허프만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바텔에 엄청난 돈을 대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정말 피터지는 경쟁을 통해 정부로부터 연구과제를 따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80년대 중반 정부로부터 따낸 대형과제중에는 연구계획서 준비에만 1백만달러를 투입해 꼬박 1년이 걸려 완성한 것도 있었다고 밝혔다. 바텔이 다른 연구기관과의 연구과제 수주경쟁에서 높은 승률을 보이는 것은 계획서 작성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바텔은 이같이 뛰어난 인적자원 외에도 효율적인 연구소 운영관리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바텔은 지난해 이곳의 「중앙실험연구설비실」의 운영을 한 외부 공작회사에 위탁했다. 이와함께 20여명의 관계직원도 끼워 방출시켰다.
밀링머신이나 레이저같은 연구설비의 외부 공개는 연구소의 수입을 늘리는데 지금 한몫을 하고 있다.
혹독하리만큼 빡빡한 연구분위기,철저한 시간관리,지나칠 만큼 효율을 강조하는 연구소의 운영방침 등등…. 온갖 스트레스 덩어리로 뭉쳐진 직장이 바텔같건만 연구원들은 바텔을 떠날 줄 모른다.
또 바텔을 떠난 연구원들은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허프만 박사는 『바텔은 연구원이 주인인 연구소』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바텔에서는 연구원이 일단연구비를 획득하면 그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묻지 않는다. 연구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은 연구자나 연구소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항목별로 세세히 용도를 지정하고 여기에 맞춰 연구비를 써야하는 우리 과학기술계의 풍토와는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콜럼버스(미 오하이오주)="김창엽특파원">
◎바텔기념연구소 어떤 곳인가/1929년 창립/연구원 8천명/연 5천건 과제수행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는 1929년 고든 바텔이라는 미국의 한 철강사업자 유지에 따라 오하이오 주도인 콜럼버스시에 세워졌다. 현재 연구원 수는 약 8천명,연간 연구비는 9억달러선으로 콜럼버스의 본부 외에도 워싱턴주 리치랜드,스위스 제네바,독일 프랑크루르트에 분소를 두고 있다.
바텔은 지금까지 한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그 뛰어난 경쟁력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같이 특출한 경쟁력은 연구소의 흥망이 전적으로 연구의 계약고에 좌우되는 바텔의 독특한 운영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텔은 연구소 운영에 충당되는 모든 비용을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경쟁을 통해 따낸 연구비에 의존하고 있다.
바텔은 이에 따라 연구개발력을 상업화에 집중시켜 돈이 되는 분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있다. 대표적인 연구분야만도 국방·항공우주·전자·컴퓨터·산업공정·교통·환경·정보시스템 등 50개가 넘는다. 연간 5천건 내외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바텔은 연구비의 약 50%를 국방부·에너지부와 같은 정부기관으로부터 타 연구기관의 경쟁을 통해 얻으며,나머지 절반은 미쓰비시·휴렛 팩커드와 같은 기업으로부터 따내고 있다. 바텔이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쌓게 된 것은 50년대 중반 세계 처음으로 복사기를 개발한 것이 결정적인 바탕이 됐다.
당시 체스터 칼슨이라는 한 발명가는 「복사기」 아이디어를 갖고 수많은 회사에 상용화를 부탁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끝에 바텔을 찾았고,바텔은 곧바로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 복사기 개발에 성공했다. 이로써 바텔은 70년 2억달러가 넘는 기금을 확보하고 제록스에서 얻은 이익금으로 과감히 다양한 연구를 시도할 수 있었다.
바텔은 그러나 이같이 이익이 계속 커지자 비영리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오하이오 대법관들의 판단에 의해 75년부터 세금이 부과되기 시작함으로써 현재 기금이 탕진 일보직전에 이르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바텔은 60년대 중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을 자문한 기관으로 우리와 인연을 맺었으며,이같은 인연으로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여명의 한국인 과학자가 근무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나 지금은 뜸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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