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평화 깰 때가 아니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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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통령주재의 신경제추진위가 30대 기업의 노사대표가 참석한 자리에서 산업평화의 정착으로 국제화시대를 뚫고 나가자고 다짐한지 사흘만에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노조가 쟁의발생 신고를 결의했다.
이 두개 대형 사업장의 노조는 80년대말이래 한국의 대형분규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현대그룹 노조총연합(현총련)과 대우그룹 노조협의회(대노협)를 이끌고 있는 핵심노조다. 또한 쟁의발생 신고의 시점이 다른 많은 사업장에서의 단체협상이 집중되는 때라 사태가 악화된다면 걷잡을 수 없이 다른 사업장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 이제 경기도 회복되고 본격적인 경제개혁을 통해 국제경쟁에 대비하자는 분위기가 어렵게 형성되고 있는 터에 우리 경제가 복병을 만난 셈이다.
산업평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과거 쓰라린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도 일정수준 이상의 인식에 도달해 있다. 경쟁력 강화가 매일의 구호가 되고 있는데 아직도 분규가 웬 말이냐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다. 그러나 산업평화는 회의책상에서나 구호를 외친다고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만드는 것이다. 그만큼 정부관련부서가 안이하게 사태에 대처해왔음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이 산업평화는 대체로 정착되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국민들은 정부를 믿었을 뿐이다.
쟁의발생 신고를 낸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노조는 기업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사권과 임금요구안을 제시했다. 따라서 이번의 공세는 통상적 노사협상에서의 우위보다는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가 추진하고 있는 제2노총의 결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적 측면에서의 공세성격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제2노총에 관한 기존입장은 무엇인지,단일사업장 단위까지 복수노조를 허용할 것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흔히 말하는 블루라운드와 관련,국제노동기구(ILO)의 요구를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것인지,노동법의 개정에 관한 일정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기존의 노총을 상대로한 노사합의를 바탕으로 임금협상의 상한선을 권고했으니 금방 한계에 부닥칠 것은 뻔하다. 대통령에게 회의를 통해 산업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고 믿게 한 실무책임자가 있다면 응당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기업들도 안이하게 대처해온 점이 많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반성해야 한다. 구조개혁도 좋고 경영혁신도 필요하지만 종업원이 소속감을 느끼게 감싸는 기업문화가 없으면 모든 것이 헛수고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제2노총이나 복수노조 문제 등은 산업평화가 유지되는 가운데 논의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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