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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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더 먼 곳을 향하여(37) 농사를 짓고 싶었다니,그건 참 뜻밖이네 그려.해지는 저녁이면 날파리 날아다니는 밭둑 깔고 앉아 늘 무슨 생각을 했었나.농투성이 신세 언제나 면해 보나,그게 자네 아니었던가.그래서 여기까지 흘러온 게 아니 던가 말일세.
탄더미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서 명국은 눈을 떴다가 감고,또떴다가 감았다.뽕나무 잎이 느릿느릿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길이멀어졌다간 가까워 온다.거기 또 하나의 자기가 걸어가고 있다.
이봐.농사꾼이라는 게 하늘이나 바라보는 게 아니던가.개미도 비오려고 하면 이리 기고,저리 기는 거라네.비 오려고 하면 제비도 낮게 나는 거라네.다 제 먹이는 챙겨두려고 하는 노릇들이아니겠는가.
뽕나무 길에 멈춰서서 멀리 논둑을 내다보고 있는 사내에게 명국은 말했다.그런데 농사꾼이라는 게 일년내내 버르적거려도 내년추수까지 기다릴 양식이 없는데,그게 어디 사람이 할 노릇이던가. 그래도 그게 아니지.농사꾼은 속이질 못하지 않던가.절기를 누가 속이며,어떻게 막는단 말인가.그게 농사꾼의 나날이라네.
한식 때면 비단 개구리 바각바각 교미해서 알 낳느라 울고,청명 곡우 되면 무슨 약속이라도 된 듯 들판의 색깔이 바뀌지 않던가.어디 그뿐.얼추 말복 넘어서는가 하면서 입추 되면,그거 참 조화속이지.새벽에 나가 봐.논둑길 걸어가자면 어느 새 정갱이에 와 닿는 이슬이 어제하고 다르거든.이게 얼마나 황홀한 일이던가.때 가고 시절 가는… 그 절기랑 내가 같이 사는구나 하는 넉넉함이 있어서 베잠방이 둥덩숭덩 걷어올리고 한여름에 비사리를 해도 마음은 때때로 저수지 제방 가의 백로 같지 않았던가.홀연히 찾아 오는 그 절기의 기막힘을 자네는 알지 않았나 말일세.그걸 한번 마음 부대끼지 않으면서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 그 말이여.
부역이네 공출이네 이리 치키고 저리 시달리고,시커멓게 기미 낀 얼굴로 그래도 감자 한 톨이라도 더 거둬들이겠다고 바가지로들어붓듯 땀벼락을 맞아가면서 밭고랑을 기고 있는 예펜네.그게 어디 사람속을 가지고야 눈뜨고 보아넘길 일이던가 .아새끼들은 또 어땠나.누렇게 황달이 들어서 흙 봉당에 쭈글치고 앉아 제가싸놓은 오줌이 햇볕에 마르는 걸 내다보고 있는 꼴,차마 바로보지 못하고 눈을 돌릴 때 자네 가슴 미어지던 일,그걸 어느 새다 잊었다 그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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