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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도서관/곰팡내나는 공부방인가/선진자료·서적없어 「국제화 역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예산부족 절차복잡… 책 1권 구입에 1년/학생들은 독서실로 이용 책걸상만 차지/마이크로정보 CD­롬등 뉴미디어 빈약
A대 경제학과 이모교수(47)는 방학 때마다 외국출장을 나간다.
도서관에 비치된 2∼3년전 학술자료들로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선진국의 새로운 이론·학술들을 감도 잡을 수 없고,새로운 도서를 신청해도 1년이 넘게 감감무소식인 경우가 많아 결국 자기돈 들여 자료를 사러 나가는 것이다.
미국 UCLA대에서 유학하고 최근 귀국한 K대 화학과 황모교수도 1주일에 이틀은 서울대나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조교들을 보내 다른 교수들의 새로운 논문을 찾아보게 한다.
미국에선 도서관 안의 단말기만 두드리면 어느 대학·어떤 단체 도서관에 무슨 자료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황 교수는 시간낭비가 짜증스럽기만 하다.
『도서관이야 시험공부하는 곳 아닙니까. 대학 졸업반이지만 전공관련 참고서적을 도서관을 통해 구해 본적이 거의 없어요. 사실 도서관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모르고요. 필요한 서적들은 다 사봐요.』
S대 경제학과 4년 서모군(23)은 학교도서관에 대해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치열한 국제경쟁시대에 새로운 정보의 입수·전파와 학문연구의 중추기능을 담당해야할 대학도서관의 시설·운영이 너무 뒤떨어져 있다.
단순히 장서의 빈약·시설부족만이 아니라 기능에 대한 인식과 운영체계 등 「근본」에 문제가 있으며 획기적인 발상전환과 투자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국도서관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3백40개 대학도서관(전문대·각종학교 포함)이 보유한 장서수는 모두 3천6백75만2천여권이다.
대학당 책보유수가 평균 10만8천여권으로 이는 미 애리조나대학이 지난해 한햇동안 사들인 책수와 거의 같다.
1천2백39만권의 장서를 가진 하버드대는 같은해 28만여권의 책을 샀다. 한국 최고 명문대라는 서울대의 보유도서는 약 1백68만여권이며 3분의 1은 일제하인 경성대학 시절에 구입한 것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동안 개선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사학명문 K대는 87년 도서구입비로 4억원을 썼지만 올해에는 그 보다 4천만원이 줄어든 3억6천만원을 도서 구입비로 책정했다.
8년전부터 도서구입비 증가가 거의 동결됐고 물가까지 올라 값진 자료들은 구입할 엄두조차 못낸다는 것이 이 대학 도서관관계자의 증언이다.
J대의 경우 1천9백91권에 달하는 학술잡지중 70%이상인 1천3백45권이 국내에서 발간된 것이다.
『국내서적도 최근 것은 거의 없고 해외 학술잡지는 6개월이나 1년이 지나서야 가뭄에 콩나듯 얻어볼 수 있어요. 선진국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국제경쟁력을 갖추라는 건지….』 이 대학 박사과정 김모씨(29)의 불평이다.
서울대가 구독하고 있는 해외 학술잡지가 우리와 국제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만대학이 보는 학술잡지의 6분의 1에 불과할 정도면 다른 대학은 따져볼 필요도 없다.
『지난해 도서구입비로 4억여원이 배정됐습니다. 한데 교수·학생들에게 무슨 책이 필요한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혼자서 책 내용을 다 검토할 수도 없고,그래서 서점·출판협회에서 발간한 신간도서 목록을 참고해 예산을 집행했습니다.』
또 다른 K대 도서구입담당자 A씨의 말은 쥐꼬리만한 도서구입 예산마저 주먹구구로 집행되는 한국대학도서관의 단면이다.
국내 대부분 대학도서관은 음반·테이프·슬라이드·지도·그림·마이크로자료·CD­롬등 책을 제외한 새로운 형태의 정보자료를 비치하고 있는 곳이 전무한 실정이다. 교육부가 요구하는 대학장서 기준을 채우기 위해 곰팡내나는 낡은 도서들을 지하실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수험생들의 공부방 기능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이다」.
미 예일대학 도서관의 머릿돌에 새겨진 어귀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현실인 시대에 우리 대학들은 너무 뒤떨어진채 변화를 모른다.<표재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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