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이대론 안된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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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 보유주식의 입찰매각을 주선했던 과정에서 말썽이 나 사임한 외환은행장의 후임을 정하지 못하고 진통을 겪고 있다. 겉으로는 행장선임이 정부의 일방적인 임명방법에서 행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한후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무부·한국은행·외환은행이 각각 자기 사람을 미느라 심한 이면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은행의 자율인사를 제도화하기 위해 도입된 행장추천위는 정부와 금융계 일각으로부터 명분만 그럴듯할뿐 실제 운영과정에서 집단이기주의를 조정할 장치가 없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주주들로 구성된 주주협의회가 은행장을 뽑도록 해 명실상부한 주인있는 경영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청아대의 경제기획원은 개방시대 금융산업의 자율적인 육성과 은행의 실질적인 민영화를 추진하는 방안을 금융전업군의 육성과 주주협의회로 보고 작업을 진행중이다.
그러나 금융정책 주무부서인 재무부는 이같은 방식은 금융산업의 공공성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인 정책이고,결국 5대기업그룹에 은행을 넘겨주는 꼴이 된다고 소극적인 입장이다. 여기에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이 민영화의 당사자인 은행의 최고경영층들이 별로 적극적이지 않은 점이다. 현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데 공연히 앞장서서 골치아픈 일을 벌이기 싫다는 입장이다. 경쟁은 위협을 내포하는데다 재무부라는 후견인에게만 신경쓰는게 편하다는 안이한 자세를 못버리고 있다.
결국 재무부와 은행측은 보신과 집단이해의 고리로 무장한채 과감한 변혁의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있고 별로 금융산업에 관해 전문성과 정책수단이 없는 다른 부서나 기업 및 학계가 개혁의 시급성을 주창하고 있다. 개혁을 해야 할 당사자들이 주춤거리고 있으나 한발짝도 진척이 되지 못한채 금융시장의 국내개혁은 이제 개방이라는 외압에 의해서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국내 경쟁이 진행되어 체질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대세인데도 우리는 아직 낙후된 금융산업을 그대로 온존시키고 있다. 실질금리는 국제수준에 비해 턱없이 높고,금융산업의 심화를 위해 필요한 소비자금융은 절름발이 신세다. 그 사이 외국기업은 쉴새없이 몰려오고 있고,미국의 자동차회사는 할부금융회사까지 진출허가를 받았다.
정부가 금융산업의 일정한 업무구획을 정해놓고 진입할 수 있는 기업수까지 정하고 있는 이상 실질적인 경쟁은 불가능하다. 국내 기업끼리의 경쟁을 통해 체질개선을 못하는 이상 선진기법을 총동원하는 외국 금융기관과 경쟁할 엄두가 나겠는가. 이런 현실을 방치하다간 개방시대를 맞아 큰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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