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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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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2년 아홉 살의 나이에 프로 입단한 바둑 기사 조훈현을 그해 문하생으로 받아들인 것은 일본의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72년 작고) 9단이었다. 한국에선 신동이 나왔다고 난리였지만 조훈현을 받아들인 세고에의 교육 방식은 특이했다. 처음 시킨 일은 마당에 쌓인 눈을 쓰는 일이었다. 허드렛일을 주로 시키고 바둑을 둬주지도 않았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참다 못한 조훈현의 부친이 항의 편지를 썼다.

 세고에의 답장은 정중했지만 단호했다. “바둑은 예(藝)이면서 도(道)입니다. 큰 바둑을 담기 위해선 먼저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격도야가 우선입니다.”
 세고에는 대국보다 바둑의 기본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특히 기보(棋譜)라고 불리는 자신의 대국 기록을 소중히 챙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보가 더럽혀지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자신의 인생이 기보를 통해 영원히 후세에 남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기보를 통해 대국에서 질 때도 부끄러운 방법을 택하지 말고 ‘아름다운’ 국면에서 돌을 던지는 것이 예(藝)이자, 미학임을 가르쳤다. 조훈현도 그렇게 3년간 기보를 통해 바둑에 담긴 절제의 미덕을 배웠다. 그 후에야 비로소 일본기원에 입단했다. 훗날 조훈현의 부친은 “그런 세고에의 가르침이 훈현이를 크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물러남’의 미학이 있다면 ‘들어감’의 미학도 있는 법이다. 공자의 철학은 “스스로 관직을 청하지 않고 예(禮)를 갖춰 부름을 받아야만 응한다”는 것이었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기 싫어했다기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 시간과 사람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일본의 아베 신조 (安倍晋三) 총리가 생방송을 통해 “힘차게 개혁을 밀고 나가겠다”고 약속한 지 이틀 만에 사임을 표명했다. 퇴진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지만 전대미문의 사임 소동에 일본 정치는 엉망이 됐다. 조훈현의 스승 세고에라면 “기보(역사)가 두렵지 않으냐”며 혀를 찰 노릇이다.

 반면 71살의 노장 정치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가 당내 전 파벌과 대다수 일본 국민의 지지 속에 차기 총리가 확실시되고 있다. 1년 전 51세의 젊은이 아베가 “새로운 시대가 왔다”며 기세를 올릴 때 그는 “난 늙은이라…”며 묵묵히 출마를 접었다. 좌우명이 ‘광이불요(光而不耀·빛은 있어도 빛내지 않는다)’라는 후쿠다의 부활은 공자의 ‘들어감’의 미학도 곱씹게 한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