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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 없으면 입원도 힘들다(특진 중병앓는 의료현장: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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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학병원 두세달 대기는 예사/서울대 내과 하루 청탁 20∼30건/장기입원환자 전담병원 설립 필요
『이 병실을 주지 않으면 저는 뛰어내립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여기는 다른 환자가 들어올 병실입니다.』
7일 오후 7시쯤 서울대병원 2층 신경내과 병실.
환자 손모씨(53·여)가 남편과 함께 병실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채 의사·간호사 등과 대치극을 벌이고 있었다. 의사·간호사·경비원까지 설득에 나섰으나 손씨는 막무가내. 갈수록 목청만 높아졌다.
손씨가 응급실로 실려온 것은 이날 오전 9시쯤. 병명은 전신에 붉은 반점이 돋아난 홍반성 낭창. 악화되면 고혈압·위장·신장장애를 일으켜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응급조치후 A급 중환자로 분류돼 운좋게 8시간만에 입원수속을 통보받았다. 열흘 이상 기다리고 있다는 옆자리 환자들의 부러움을 산 것도 잠시. 병원측이 착오였다며 방을 비우도록 요구하자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3시간여 실력행사 덕분에 손씨는 병원측의 배려로 비상용 특실을 차지할 수 있었다.
동네병원은 텅텅 비고 큰 대학병원은 만원이다.
전국 16만4천5백여개 병상의 평균 이용률은 79.1%. 특히 1백50병상 미만의 소규모 병원은 71.5%로 학계·의료계가 주장하는 적정이용률 85%에 크게 못미친다.
반면 3백병상 이상은 88.3%,4백병상 이상의 3차병원은 98.0%(한국의료관리연구원 「92년 병원경영분석」). 그래서 유명 대학병원은 날마다 입원전쟁이 벌어진다.
병상수 1천개의 서울 중앙병원 입원대기 환자는 현재 1천5백여명. 내과환자는 45일,외과는 30일 정도 기다린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가톨릭대 등 다른 대학병원들도 진료과목에 따라 2∼3주에서 수개월씩 기다려야 한다.
『입원청탁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외부기관·병원 직원 등 거절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줄지어 대기하고 있지만 압력성 청탁이라 외면할 수도 없고….』 서울대병원 원무과 한 간부의 푸념.
내과가 가장 심해 4백28개 병상중 매일 30∼40개의 병상이 비지만 청탁이 20∼30건에 달해 애를 먹는다고 했다.
심지어 『이틀후까지 병실을 만들라』는 지시형도 흔하다는 것.
『응급환자도 아닌데 입원을 빨리 하려고 응급실 병상을 차지하고 있는 입원대기 환자들이 늘 30여명쯤 됩니다. 응급실 환자는 대개 10일 이내에 입원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응급실도 입원대기 기간을 단축하는 편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중앙병원 내과 레지던트 김영학씨의 말이다.
대학병원들도 잡음을 예방하고 입원대기 기간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이다.
서울대병원은 응급실 대기자도 증세의 경중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매일 등급을 재평가해 입원순서를 정한다.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은 매일 입원 확정자 명단을 게시한다.
안과·정형외과 등은 수술을 입원상태에서 하지 않고 수술 당일 퇴원토록 하는 외래수술제를 도입하는 병원도 늘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조만간 외래수술실을 개설할 방침이다.
유명 대학병원들이 입원전쟁으로 몸살을 겪는 것은 의료기관간에 기능적인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데다 의료전달체계가 취약한 것이 근본원인.
대규모 대학병원도 작은 병원과 똑같이 백화점식 진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입원환자가 의료수준이 보다 나은 대학병원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노인성 만성질환자가 늘고 산재·교통사고 환자들이 보상문제 때문에 병상을 장기간 차지하는 것도 원인.
3차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의 44%가 1,2차 병원에서 치료가능한 경증이며 1개월 이상 장기 입원중인 환자가 23%나 돼 병실난을 가중시킨다는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결과다.
미국·유럽 등 의료선진국에는 입원전쟁이란 없다.
독일의 평균 병상 이용률은 우리보다 훨씬 높은 86.0%. 그러나 지역·병원 규모간 의료수준 격차가 작아 이용차들이 대형 종합병원으로 몰리지 않기 때문에 독일에는 입원난이 없다. 대학병원은 외래진료조차 특수질환자나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퇴원환자들로 제한할 정도로 의료전달체계가 확고하다.
한만청 서울대병원장은 대학병원 중증환자의 수술과 처치,교육과 연구만을 전담할 수 있도록 의료체계를 수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의료의 질과 서비스 정도를 평가하는 병원 신임제도를 통해 중소병원의 전문화·고급화를 유도,국민들이 믿고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노인병·재활·교통사고 등 장기입원 환자들을 전담하는 공공요양병원을 설치,대학병원의 병목현상을 완화해야 한다는게 한 원장의 의견이다. 『외국처럼 대학병원이 환자의 경과에 따라 병·의원에 되돌려 보내는 제도도 필요합니다.』
송건용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연구부장은 입원전쟁이 진료체계 미흡과 왜곡된 국민의식이 빚어낸 「한국병」이라며 의료개혁 핵심과제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병원 신임제/외부서 진료수준등 평가/“우수” 판정되면 각종혜택
정부나 민간단체가 주체가 돼 병원의 시설·인력·진료수준 등을 평가,인정함으로써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제도.
1917년 미국에서 시작돼 70년대이후 유럽국가들로 확산되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참여가 의무화돼 있다.
전체병원의 84%가 참여한 미국은 신임병원에 대해 보험계약조건을 우대하고 정부의료사업 참여자격을 준다. 54년 이 제도를 도입한 캐나다는 신규사업에 대한 금융지원과 전공의 수련병원 지정조건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신임병원만 의료보험 취급을 지정해준다. 우리나라도 의료보장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도입을 검토중.
선진국에서는 이 제도가 시설·장비·인력 등 의료여건 평가에서 진료의 질 평가단계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우선 여건을 대상으로 신임병원에 대해 의료보험수가를 가산 지급한다는 구상이다.<이덕령·정제원기자>
□도움말 주신분
▲한만청 서울대병원장
▲김창엽 서울대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조병륜 보사부 의정국장
▲송건용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연구부장
▲이신호 한국의료관리연구원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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