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도련님 정치인' 의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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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52) 일본 총리가 사임을 발표한 다음날인 13일 오전.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아베 총리와 수행원을 태운 검은 승용차 행렬은 도쿄 시내의 게이오(慶應)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차량이 멈춘 곳은 정문도 후문도 아니었다. 아베 총리는 주택가와 연결돼 있는 옆문을 통해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을 찾았던 50대의 한 주부는 이런 행태를 보고 "사의를 표명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총리가 이렇게 당당하지 못하니 창피하다. 모두 '도련님 정치인'의 한계"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베 총리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정치인 가문의 혈통을 잇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외할아버지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安倍寬)은 중의원,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는 외상과 자민당 간사장을 지냈다.

아베 총리의 정치 경력을 보면 굴곡이 없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야마구치현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3년 중의원에 첫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공천을 걱정해 본 적도, 지역구에서 발품을 팔아야 할 일도 없었다. 이른바 일본 정치에 필수적인 '3방'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3방'이란 '가방'(자금), '간판'(지명도), '지반'(후원회)의 일본어 끝 발음이 모두 '방'으로 끝나는 데서 만들어진 표현이다. 현역 의원 중 약 20%가량이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돼 있다. 물론 정치인 가문에서 자라 일찍부터 정치에 눈을 뜨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뛰어난 정치 수완을 발휘하는 정치인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임 파동에서 보듯 아베 총리는 '도련님 정치인'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 줬다. 아무리 본인의 건강상태가 안 좋고 정치적 환경이 불리하더라도 국민을 대표하는 일국의 지도자라면 국민에 대한 약속인 '소신표명'을 국회에서 밝힌 지 이틀 만에, 또 야당 당수와의 국회토론이 시작되기 10분 전에 사임을 밝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모두 리더십의 문제로 귀착된다. 국민을 받들고 이끌어 가는 강력한 리더십을 스스로 쌓아 가는 연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받들어 주는 데 익숙하다 보니 고독해진 순간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싶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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