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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사람>"사랑속에 숨고싶다"연출 金綺泳 원로영화감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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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외곬 영화인생 40년 원로 영화감독 金綺泳씨(75)가 최근 몇년간의 침묵을 깨고 새 봄을 맞아 연극 연출을 맡아 화제를 뿌리고 있다.
평생 영화만을 고집해온 그에게 연극 연출은 뜻밖의 외도인 셈. 이번에 그가 선보이는 극예술집단의『사랑속에 숨고 싶다』는 입센의『유령』을 자신이 직접 번안.각색한 작품.『유령』은 그리스극『오이디푸스왕』,셰익스피어의『햄릿』과 함께 세계 3대 비극중 하나로 인간의 유전학적 본질을 다루고 있다.후천 적인 생활기억만을 제외하면 인간의 추악한 본능.기질.습성,심지어 성병까지도 후세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결국 죄업의 인과는 끝없이 윤회한다는 운명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49년 서울醫專 연극부 시절 이 연극을 상연했는데 그해 최고 연극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결국 이 연극이 내게 의사가운을 벗어던지고 영화의 길을 걷게 했죠.45년만에 다시 무대에 올리고나니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그의 연극 활동은 따지고보면 영화 제작보다 훨씬 앞선다.해방 직후인 45년그는 세브란스.서울의전학생들과 주축이 돼「조선학생연극협회」를 결성하고 대표를 역임했다.협회소속 극단「세란」을 이듬해 창설하고 의대 동기생 鄭鎭宇(피아니스트 ).朴巖(작고.영화배우)등과평양 금천대座에서 프랑스작가 빌드라크의『商船 테나시티』로 해방후 첫 국내 연극 공연을 가졌다.
당시 蘇聯 검열관이 이 극을 보고 반해 그에게 모스크바 연출유학을 제의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의 아내 金有鳳씨(67.김유봉치과의원 원장)와도 대학시절『베니스의 상인』에서 여주인공과 연출자로 만나 첫눈에 반해 동거로 출발,결혼에 이를 정도로 연극에 심취했던 그이고 보면 고희가 넘은 나이에 첫 상업적 연출이란 이번 공연은 오히려 때늦은감마저 있다.
『영화와 달리 검열이 없다는게 무엇보다 좋습니다.가위질당하는장면도,금지된 대사도 없고 또 소재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점이 영화보다 훨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할까요.이번 연극은 근친상간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영화였다면 엄두도 못낼 일이죠.
』 이번 공연에서 金감독은 원작의 메시지를 살리되 극의 구성은완전히 뜯어고쳐 특유의 영화적 기법을 동원한「표현극」으로 재창작했다. 영화속「金綺泳流」의 사디즘적 연출은 연극에도 그대로 재현된다.첫날밤을 맞는 신부에게 무릎꿇고 절대 복종을 맹세하며개처럼 엎드려 짖으라고 강요하거나 아들이 어머니에게 독약을 먹여줄 것을 부탁하는 장면등이 그것이다.원색적인 언어,그 로테스크한 분위기,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발가벗기듯 드러내는 해부학적연출은 한눈에 그의 작품임을 알게 한다.
『動線 활용을 거의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연극은 영화와 달리 움직임을 통한 현장감 재현이 중요한데 그 점을 간과한거죠.공연중이라도 계속 보완해 나갈 작정입니다.』 78년 영화『느미』촬영때 감독과 조감독으로 첫 인연을 맺은 극예술집단 대표 강철웅씨의 간청에 못이겨 시작한 연극이지만 일단 일을 맡았으면 완벽하게 매듭지어야한다는 그의 프로정신은 만족을 모른다. 金감독의 이런 열정에 반한 명동 엘칸토극장측은 두달간 공연장을 무료로 사용하도록 파격적인 배려를 했다.74년『파계』로 인연을 맺은 탤런트 임영규가 첫 연극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대본을보자마자 그자리에서 흔쾌히 출연을 결정한 것도 그 런 金감독의인간적 매력에 끌려서였다.
『좋은 연극이 있으면 1년에 한두번쯤은 계속 연출을 해보고 싶습니다.영화에선 느끼지 못하는 또다른 맛이 연극엔 있는 것같아요.물론 본업인 영화제작은 계속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가 제작한 영화는 줄잡아 50여편.釜山피난시절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던중 극작가 吳泳鎭의 소개로 美國공보국(USIS)의대한뉴스 제작에 참여한 것이 그의 영화 인생의 시작이고보면 1년에 1편 정도 제작한 꼴이다.
92년『천사여 惡女가 되라』를 끝으로 최근엔 거의 활동을 중지했지만 결코 영화제작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게 그의 얘기다.
『현재 시나리오를 검토중입니다.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있어 그동안 미뤄왔던 작품인데 금년내로 완성할 계획입니다.』 朝鮮시대한의사를 주인공으로 인간의 애욕적 갈등을 그린 영화『夢遊』를 통해 특유의 사디즘적 색채와 영상을 선보이겠다는 얘기에 열을 올리면서 그의 눈빛은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일흔이 넘은 나이도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정열에는 조 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하루는 대부분 시나리오 손질과 저녁이면 50년지기인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는 것으로 채워진다.
최근 개봉되는 영화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관람한다.최근 작품으론 스티븐 스필버그의『쉰들러 리스트』가 인상적이었다며 영화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을 수 있는 미국감독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피아노』는 여성의 심리적 갈등을 표현하는 기 교가 탁월했다고 나름대로 진지한 평을 내리기도 한다.
그가 한국 영화에 기여한 큰 부분은 많은 스타 배우들을 발굴했다는 점이다.金芝美.尹汝貞.文姬등을 비롯,朴巖.崔戊龍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그의 손을 거쳐 배우가 됐다.
그의 작품들은 서정적 멜로물이나 심리극 리얼리즘 계열의 양상을 보이면서도 저변엔 인간 본성에 대한 냉혹한 분석과 사디즘적파괴력을 깔고 있다.그의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특유의 분위기로 관객에게 전율에 가까운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한 다.
국내 최초의 동시녹음영화『죽음의 상자』를 비롯,초기엔『양산도』『황혼열차』등 서정적인 멜로물이 주를 이뤘으나『初雪』『10대의 반항』에 이르러 그의 작품은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기법으로 바뀐다.그후『下女』『현해탄은 알고있다』『고려장』에 와서는 인간의 심리를 낱낱이 해부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작업을 의사가 메스를 들고 환자를 해부하는 것에 비유한다.인간을 해부한다는 점에서 영화감독과 의사는 동질성이 있다는 것.그가 의사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것을 평생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던 큰 이유도 이런 동질감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李正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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