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경쟁 죽이는 청와대발 통신료 인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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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27일. 당시 노준형 정보통신부 장관과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은 국회에서 만나 청소년이 즐겨 쓰는 무선 데이터 통화료를 30% 내리고 저소득층에 요금 할인 혜택을 주자고 합의했다. 정통부는 2100억~2800억원의 통신요금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는 효과가 있다며 생색내기 보도자료를 돌렸다. 이동통신사들은 할 수 없이 정부의 결정에 그냥 따랐다.

그 후 1년쯤 지나서 이번엔 청와대가 나섰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4일 오후 "정부는 이동전화요금을 일부 합리화하고 저소득층과 청소년에게 유리한 요금 제도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휴대전화 요금을 챙기라고 역설한 뒤 나온 설명이다. 노무현 정부는 가을 정기국회가 열릴 즈음이면 어김없이 휴대전화료 인하 카드를 들고 나왔다.

2004년엔 휴대전화 기본료가, 2005년엔 발신자 표시 서비스, 지난해와 올해엔 청소년과 저소득층의 요금이 도마 위에 올랐다. 사정이 이러니 업체들도 경쟁을 통해 요금을 내리기보단 정치권이나 정부가 제시하는 '가이드 라인'에 더 신경을 쓴다. 정부가 정해주는 대로 따르는 게 속이 편하다고 한다.

이미 업체들은 장애인과 기초생활 수급자에게는 휴대전화 가입비를 면제해 주고 기본료와 이용요금의 35%를 싸게 해주고 있다. 또 성인보다 싼 청소년요금제를 내놓고 있지만 정부의 채근은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고 업체들은 볼멘소리다.

청와대의 주장대로 가계부담을 덜어준다는데 누가 싫다고 할 건가. 그러나 조금만 길게 보면 이는 상책이 아니다. 업체 간 자유로운 경쟁을 펼쳐 요금이 내려가면 모든 이용자가 혜택을 볼 수 있는데 그 싹을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도 이런 정부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녹색소비자연대 측은 "정부가 나서서 특정 계층에 대해 시혜적으로 요금을 내리도록 종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부는 현재의 요금이 제대로 책정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고 업체가 자율 경쟁을 펼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청소년이 쓰는 휴대전화 요금을 내리는 것이 꼭 좋은 일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이미 청소년의 휴대전화 중독의 심각성이 제기되고 있다. 요금을 더 낮출 경우 이런 현상이 더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 6월 말 '휴대전화 중독 원인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단국대 유홍림·윤상호 교수는 "문자메시지 무제한 이용 같은 요금제가 중독의 주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를 유도해 재미를 본 정부가 일반기업의 서비스 요금을 놓고 도가 넘게 간섭하는 모양을 보니 언제 냉장고나 아이스크림 값도 내리라 할지 모를 판이다.

김원배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