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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불교에 거는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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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참석자들은 두 파로 갈렸다. ‘고기파’와 ‘풀파’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육식을 하시는 스님이나, 채식을 하시는 스님이나 경계가 없었다. ‘살생을 멀리 하는 스님이 고기를?’ 하는 의구심은 부질없었다. 음식은 음식이었다.

 우리 불교인은 일본에서 크게 두 가지를 보았다. 첫째는 부러움. 숱한 전란으로 옛 모습을 잃어버린 우리 사찰과 달리 일본의 절집은 원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교토(京都) 주변의 대다수 사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었다.

둘째는 자부심. ‘선(禪)’의 전통을 지켜온 한국 불교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국가 중심의 중국 불교, 생활 중심의 일본 불교와 달리 ‘확철대오(確徹大悟)’의 알맹이를 간직한 한국 불교의 미래를 기약했다.

그런 불교가 요즘 어물전 꼴뚜기 꼴이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 임용 의혹, 제주 관음사 주지 임명 과정의 마찰, 백담사 주지의 국고 보조금 횡령 의혹 등등 곳곳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한 불자는 “요즘 같아선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며 비통해했다.

이보다 더 슬픈 현실은 조계종이 분파로 갈려졌다는 사실이다. ‘불이(不二)’가 절대 화두인 불교가 둘, 아니 셋, 나아가 너덧 개로 조각나고,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행태는 아무래도 불교답지 않다. 언론에 보도됐듯 신씨의 석연찮은 교수 임용 과정에는 동국대 이사회의 내분, 동국대의 주류와 조계종 총무원의 갈등이 개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에서 악수하고, 뒤에서 헐뜯는 대선 정치판과 다를 바 없다. 권력 앞에선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무의미한 모양이다.

단, 기억할 게 있다. 분파가 마냥 부정적인 건 아니다. ‘두루뭉실한 하나’보다 ‘색깔 분명한 여럿’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어정쩡한 하나는 언제라도 갈라질 수 있으나 ‘서로 다른 여럿’은 큰 하나를 위한 화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인 ‘중도(中道)’의 뜻도 여기에 있다.

조계종의 분열은 사실 한국 불교 민주화의 부산물이다.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에 반대하며 ‘개혁불사’를 주창했던 게 뿌리였다. 당시 개혁파 스님들은 의현 스님이 좌지우지했던 총무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부에 해당하는 종회의 권한을 강화했다. 하지만 순수했던 초발심(初發心)은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밥그릇 싸움처럼 변질됐다. 바람직한 종책(宗策)을 마련해야 할 종회가 끼리끼리 모이는 파벌로 전락됐다. 그 후유증이 요즘의 세(勢)대결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동국대의 한 이사 스님은 최근 사태를 지켜보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국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주류(영담·영배 스님)와 비주류(장윤 스님) 모두 ‘극단’으로 치달았다고 인정했다. 불교의 요체인 ‘중도’를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지금 해법은 하나다. 논란의 장본인인 장윤 스님이 입을 열어야 한다. 언제까지 호텔로, 사찰로 숨어 지낼 것인가. 이게 바로 조계종에 거는 마지막 희망이다. 그러면 극단과 중도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한국 불교는 깨우쳐왔다. 숱한 욕망이 충돌하는 현대사회의 비상구는 ‘너와 나’를 나누지 않는 불교에 담겨 있다고. 그 가르침이 지금 구두선(口頭禪)으로 떨어질 위기다. 4일 “장윤 스님은 떳떳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결의한 중앙종회에 실낱 기대를 걸어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