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장관들 일정 “빡빡”/정책구상 겨를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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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각종회의·모임·접견등에 시간뺏겨/「시어머니」 많아져 툭하면 “호출”
5공화국시절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낸 정인용씨는 광화문 청사에서 회의가 있는 날은 웬만하면 수행비서를 승용차에 태우지 않았다. 대신 비서관용인 운전석 옆좌석에 앉아 좌석을 뒤로 누이고는 과천청사의 집무실로 돌아갈 때까지 누운자세에서 눈을 붙였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장관들의 바쁜 일정엔 큰 변화가 없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웬만한 행사나 회의는 차관이나 차관보급을 대신 내보내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요즘은 그럴수도 없다. 장관을 오라가라하며 시어머니처럼 참견하는 자리는 오히려 더 많아졌다. 높은 사람이 정신없이 바쁜 조직치고 잘 돌아가는 조직이 없다고 본다면 경제장관들의 여유없는 일과 역시 좋은 현상으로 보기가 어렵다.
가령 여당과의 당정회의만 해도 지난 정권보다 잦아졌다. 중요한 법안이나 예산을 다루는 당정회의는 물론이고 요즘은 경제공부에 열심인 의원들이 크게 늘어나 장관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있다.
청와대 역시 경제수석실외에 농림수산 수석실이 신설돼 호출이 잦아졌고,실세총리로 불리는 이회창총리가 들어선 뒤로는 총리실 출입도 늘어났다. 이 총리는 경제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관계부처 장·차관들을 불러 배경과 대책 등을 챙기고 있다.
과거보다 장관들의 총리실행이 잦아지다보니 엉뚱한 오해도 생긴다. 장영자사건이 터졌던 지난 1월말 총리실에 배경설명을 위해 불려갔던 홍재형 재무장관은 일부 언론으로부터 「사표제출」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불필요한 동선이나 시간을 줄이려는 장관들의 노력도 갈수록 강도를 더 해가고 있다. 청와대나 총리실 등 강북행이 잦은 경제장관 대부분이 과천청사 장관실외에 광화문 주변에 집무실을 두고 짬짬이 업무를 챙긴다. 하루평균 3∼4시간을 보내는 승용차는 또 다른 집무실이다. 정재석 부총리는 차에서 내릴 때까지 카폰으로 구두결재와 업무지시를 계속하며,홍 재무는 차에 타자마자 영어회화 테이프를 틀어 놓은채 보고서나 영문잡지를 읽는다.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는 김철수 상공자원부장관은 토요일 퇴근길에 밀린 결재서류를 한가방씩 들고가 일요일에 처리하며,그나마 주말엔 지역구(서울 송파갑지구당위원장)를 챙겨야 하는 김우석 건설장관은 귀가후 오전 2시쯤까지 서류검토를 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차분하고 생산적인 풍경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장관도 사람인데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제대로된 정책도 기대하기 어렵다. 심지어 사진 한장을 위해 장관을 부르는 모임도 적지 않다.
장관들이 필요이상 불려다니느라 소관업무를 돌보고 정책을 구상할 시간을 뺏기는 동안 「생산적인 정부」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손병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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