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물오징어를 다듬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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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물오징어를 다듬다가’ -유안진(1941- )

네 가슴도 먹장인 줄 미처 몰랐다

무골호인(無骨好人) 너도 오죽했으면

꼴리고 뒤틀리던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진

검은 피 한 주머니만 껴안고 살다 잡혔으랴

바닷속 거기도 세상인 바에야

왜 아니 먹장가슴이었겠느냐

나도 먹장가슴이란다

연체동물이란다

간도 쓸개도 배알도 뼛골마저도 다 빼어주고

목숨 하나 가까스로 부지해왔단다

목고개 오그려 쪼그려

눈알조차 숨겨 감추고

눈먼 듯이, 귀먹은 듯이, 입도 없는 벙어린 듯이

이 눈치 저 코치로

냉혹한 살얼음판을 어찌어찌 헤엄쳐왔던가

비늘옷 한벌 없는 알몸으로 태어난 너도, 나와 다름아니다. 남의 옷 한가지 탐낸 적 없이 맨몸으로 살았던 너의 추위 너의 서러움을 나도 안다, 알고 있는 우리끼리 이렇게 마주친 희극적 비극의 비극적 우연도, 어느 생애 지어 쌓은 죄갚음이라 할 건가.


물을 받아놓고 물오징어를 다듬고 있다. 배를 열어주고 먹통을 내놓는다. 그때 칼날이 내 뱃속을 가르고 지나간다. 언젠가 다 내려놓은 순간, 나의 간과 쓸개는 누가 만지고 있을까. 이 고해의 지상에서 타자의 물오징어를 만지며 배를 갈라보았겠는가. 그때 무슨 생각이 지나간 것일까.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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