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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호 06면

유용주 시인

유용주·한창훈 작가의 '벗에게 보내는 편지'

巨文(거문-한창훈씨의 호),
잘 내려갔능가? 시차적응은 워뗘? 일년에 잘해야 서너 번 얼에 깃을 친 골짜기를 보면서 구름에 술 스며들 듯, 한 사나흘 묵지근하게 들이마시다 자네 떠나면 한동안 공황장애를 겪고는 하지. 왜 그 있잖나, 알코올중독자가 정신병원 입원하면 한동안 바보처럼 멍하니 있듯, 복싱선수가 카운터펀치를 맞고 몇 초 동안 뇌가 백지상태가 되듯, 아무 생각 없이 꼭 마신 만큼 후유증에 시달리는 증세는 이미 오래되었다네. 이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단하와 은서까지 데리고 왔으니, 더 아쉬운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려. 아이들에게 좀 더 맛있는 거 만들어주고 바다에도 데려가고 멋진 영화도 보여줄 예정이었는데, 겨우 이틀 자고 떠난다 하더니 차가 서산의료원 사거리에서 가야산 쪽으로 아주 멀어질 때까지 그냥 글썽이고만 있었네. 어쩌겄어, 저 비산비야에도 소슬바람 불고 낙엽 떨어지고 난 뒤, 헛간에 눈 내릴 때쯤 겨울방학 또한 공장 간 누이처럼 돌아오면 그때 다시 내 누옥을 찾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술 항아리 맑게 닦아놓고 모가지 길게 빼어 슬픈 짐승처럼 몇 번 컹컹 짖어댈 수밖에.

사실을 말하자면, 巨文 자네가 말라카 해협을 박차고 인도양을 건너 지중해를 휘둘러 암스테르담, 그 프리덤스러운 해방구를 향해 스콧 선장이 되어 심해어의 꿈을 꿀 때, 나, 이 흉측스러운 고릴라 한 마리도 꼭 바다만큼 넓고 깊은 작품을 써야겠다고, 돌아온 자네 풍성한 턱 밑에 고국에서도 수준 높은 작품을 쓰는 물건이 하나 있었네, 어쩌고 하면서 입 버캐를 물려고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 서투른 목수가 얼키설키 수리해놓은 낡은 집처럼 아주 작은 충격에도 금방 무너지고 말았네. 자네가 떠난 뒤 고국은 아주 짜잔한 곳이 되어버렸네. 축구는 계속 깨지고 강력 범죄는 늘어나고 부동산 투기 강풍이 불고 지나간 자리에 전세금 빼내 마이너스통장 만들어 주식과 펀드에 올인하는 폭풍이 불더니 성형 열풍과 사교육 태풍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한바탕 먹구름을 만들어 급기야 장마철이 시작되었네. 늘 그렇듯, 개발과 성장이 만병통치약이 돼버린 고국은 신도시니 혁신도시니 골프장 건설이니 스키장 건설이니 하면서 온 나라를 파헤친 나머지, 졸지에 휩쓸려 떠내려간 수재민들만 꿈자리 사나운 한뎃잠을 자고 있다네.

여기 서해 끄트머리 내 사는 곳에도 비는 한 달이 넘게 줄기차게 쏟아져 가뜩이나 빨래 걱정에 강박증세 시달리는 전업주부를 힘들게 했네. 방학이 되어 이 지긋지긋한 주부습진에서 풀려날까 했는데 바깥양반은 무슨 연수에다 대학원 논문까지 정신이 없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을 하는 거라. 덕분에 학력 별무인 나하고는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네. 왜 아니겠나, 사기 치지 않고 떠나려면 빨리 나이 먹어 저 저승꽃 찬란하게 핀 노인대학 접수하면 학력격차가 좁아질는지. 아이도 그렇지, 고등학교 들어가자 방학이 없어졌어. 남들 과외에다 학원에다가 신문 방송에 오르락내리락할 때 우습게 봤는데, 어쩔 수 없더라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끌 수밖에. 해서 36도가 오르내리는 좁은 전세방에서 이 한 몸 불태워 요리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주부의 나날들은 계속 이어졌다네.

자네한테만 고백이지만 연애 2년, 결혼 18년차, 지긋지긋해. 모든 게 귀찮아. 아이만 아니라면 그냥 콩국수 하나 냉면 한 그릇으로도 버틸 수 있을 걸세. 청소는 일주일에 두어 번 청소기만 돌리고 설거지는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 음식 담을 그릇이 없으면 마지못해 달그락거리지. 그러나 물은 끓여 먹네. 숙취를 달래기 위해 식혀 두어야 하거든. 매사 하루하루가 심드렁하고 재미없는 나날들일세. 요 앞 상가 아줌마들과 열무비빔밥을 양푼에 비벼 먹고 순대 썰어 소주에다 맥주를 돌리면서 바깥양반 흉을 보고 욕을 해도, 운동을 해서 늘어진 가슴과 튀어나온 똥배를 다듬으려 땀범벅이 되어도, 집에 들어오면 후텁지근한 공기와 쌓인 빨랫감과 탑을 이루는 설거지 그릇과 먼지 뽀얗게 내려앉은 방바닥이 나를 반겨주지.

외롭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하루가 달리 머리는 눈발이 날려 저승에서 온 편지가 둥지를 틀고, 눈은 흐려져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신문 한 장 읽기 어려운 데다가 엉덩이 근육은 흐물흐물, 눈가에는 기미와 주름이 동양화 한 폭을 근사하게 선사하고도 남는데, 밤은 덥고 끈적거리고 더디게만 흘러 갱년기를 막 지나는 전업주부의 심사를 한없이 꼬이게 만드네. 그리하여, 덥다고 한잔, 끈적인다고 한잔, 학원 간 아이 마중 나갈 때까지 잠들지 말자고 한잔, 언제나 회식 중인 바깥양반을 기다리면서 한잔, 지쳤다 두 잔, 하다 보니 만성주부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렸네. 한마디로 장마철 물걸레 같은 인생이 되고 말았다네. 이렇게 살다 보면 누구랄 것도 없이 아이는 저 혼자 큰 듯 결혼해서 멀리 떠나버리고 경제력에서 압도하는 저 냥반에게 버림받아 그늘 깊은 비탈에 먼저 묻히고 마는 인생이 되고 말겠지. 울다가 웃다가 그냥 이 짐승스러운 몸이 한없이 부끄러워 또 한잔, 그득 부어 두어 잔 더 하다 보면 오지 않을 것 같은 새벽도 가볍게 몸을 바꾸고 만다네.

꿈을 꾸었던가, 문밖에서 자박자박 우렁각시처럼 발소리 사뿐하게 바깥양반이 돌아와, 누구 것인지도 모를 담배냄새와 술냄새와 땀냄새를 풍기고 쓰러지면, 옷 벗기고 스타킹 벗기고 끙끙거리며 들어올려 침대에 누이고, 옳다꾸나!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이십 년 가까이 닦고 조이고 기름친 서러운 갱년기 주부 몸을 은근살짝 들이대면서 “오, 마이 프린세스 피오나” 주절대보는 거라. 그때, 잠들었다고 생각한 아내가 벌떡 일어나 관운장 눈을 치켜뜨며 “아니, 이 인간이, 더운 날 누구 불쾌지수 높일 일 있나, 뭐, 피오나? 내 인생 너 때문에 피난다, 피나!” 하면서 “슈렉이니 킹콩이니 다른 영화는 대박도 잘도 터뜨리던데 저 인간은 일년 열두 달 하냥 화려한 휴가에 지나가는 행인역 하나 맡지도 못한 주제에…”, 파충류 보듯 발로 차버리니 그냥 ‘음메 기죽어’ 하며, 거실로 나올 수밖에. 밖은 여전히 추적추적 비 내리고 텃밭에 심은 채소들은 녹아내려 내 인생 가을에는 쭉정이밖에 수확할 게 없으니, 왼쪽 옆구리께에서부터 밀물처럼 몰려드는 통증 때문에 남은 술을 몽땅 비울 수밖에 없었다네. 어쩌겠나, 낡은 선풍기를 죽부인 삼아 껴안고 말복 입추 처서 지나 귀뚜리 울음 깊어지는 초가을 밤을 허벅지 바늘 촘촘히 찔러가며 견딜 수밖에. 문신 문장 그려 넣으며 버틸 수밖에.

어이 巨文,
되돌아보면, 그래도 내 인생 반타작 넘어 한 겨. 자네 같은 친구 만나 행운이었지비. 드디어 엊그제 아이가 개학을 해서 학교까지 모셔다 드리고 왔네. 벌써 들판엔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있더구먼. 세상 망할 때 망하더라도 저 고개 숙인 생물들 앞엔 잠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네. 올가을엔 그대가 사는 바다만큼 외로운, 저 하늘만큼 가볍고 가벼운, 들판처럼 겸손하고 겸손한 작품을 써야지, 온 인생을 다 걸고 한번 써봐야지, 반성과 다짐을 묘비명 새기듯 써넣었다네. 두툼한 원고 가슴에 품고 한달음에 달려가면, 뫼악 성님 모시고 미천과 한사 불러놓고 ‘장진주사’ 불러가며 용맹정진, 연구 및 공부를 심화해 보세나.
옴옴옴, 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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