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사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미안하다(I’m sorry)’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미국 조그비의 여론조사 결과다. 연봉 10만 달러(약 9500만원)가 넘는 사람은 92%가 그 말을 하는데 2만5000달러(약 2400만원) 이하 소득자는 절반 정도인 52%에 그쳤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려 하기 때문이란다. 그 편이 자신에게 안전하다고 믿어서, 말 한마디로 때우기 위해서 사과하기도 한다. 미안할 짓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란 해석도 덧붙여 놨다.

정치인은 힘이 있는 동안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누가 진짜 잘못했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힘이 약한 사람이 센 사람에게 사과해야 하는 걸로 안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이나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의 ‘카노사의 굴욕’은 힘이 약해 무릎을 꿇은 대표적 사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여간해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취임 4년차인 1997년 연두기자회견이 그랬다. 노동법 날치기로 민심이 흉흉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여야 영수회담도 거부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서너 차례나 “그만하자”며 손사래 쳤다. 성의 없고 오만한 자세가 오히려 레임덕을 불렀다. 결국 그 한 해 동안 그는 여섯 번이나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고, 외환위기까지 당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사과를 너무 잘 하는 편이다. 87년 민주당을 깨고 나간 이후 선거에 질 때마다 눈물로 사죄했다. 그러고는 정치에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전임자의 학습 효과로 4년차 연두회견에서는 먼저 머리를 숙였다. 세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세 아들의 비리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이라며 사죄했고, 대북 송금이 터져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치게 돼 참으로 죄송하기 그지없다”고 사과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YS보다 더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이다. 국회가 의결해도, 중앙선관위가 지적해도, 헌법재판소가 결정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당이 자신을 내쫓고, 몽땅 탈당해 과거로 돌아가도 끝까지 버틴다. 탄핵 위기에 몰리면서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런 노 대통령에게 DJ가 최근 사과를 요구했다. 스스로 국민 앞에 사죄했던 대북 송금을 특검한 것과 국정원의 불법 감청 수사, 민주당 분당에 대해서다. 결말은 어떨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마다 머리를 조아리는 걸 보면 누구의 굴욕으로 끝날지 짐작이 가지만.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