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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5부] 봄 (1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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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그림=김태헌]

우리는 그제야 연애 사이에 겪어야 할 갈등을 겪게 된 거야. 민주화가 되고 나니, 혁명가는 퇴물이 되어 버렸던 거야. 엄마는 숭배해야 할 대상을 잃게 되어버린 거야. 밤새워 책을 읽던 그 젊은이가 어느 날 난데없이 무력한 가장이 되어 엄마 앞에 서 있는 거야. 그리고 그는 영민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를 사랑했으니까 눈치 채게 된 거지. 엄마가 그를 더 이상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건 사랑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야. 우리가 함께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였지만, 증오의 대상이 스스로 항복하고 나자, 그 증오는 이제 미숙한 서로를 향해 겨누어지게 된 것이지. 하지만 그냥 평범한 집안의 모범생으로 자란 엄마에게, ‘첫’ 자가 붙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눈 그를 떠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탈출구가 없었고, 엄마는 멍하니 텔레비전만 보며 엄마의 이십대 후반을 보낸다. 너는 크고 있었고,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어.
 
그의 말대로 “외출하지 않고도 소설은 얼마든지 쓸 수가 있는 것”이지. 그 이후로 엄마는 줄곧 칩거의 시간을 가지며 소설들을 썼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그때 한 글자도 더는 쓸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집을 떠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고 개선의 희망조차 없는 삶…, 그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안이한 선택을 하게 되었단다. 그건 그냥 나를 희생하고 말기로 한 거지. 소설 같은 거 없어도 사는데 아무 지장도 없을 테니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이후의 결혼과 이혼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누군가 아프거나 불구가 되지 않는 한, 가족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 갔다가 집으로 들어가는데 문을 열 수가 없었어. 손잡이를 당길 수가 없는 거야. 그 느낌이 얼마나 강렬하든지,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한 시간을 서서 진땀을 빼다가 엄마는 겨우 그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쨌든 거기에는 네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엄마니까.
 
하지만 그날 밤, 엄마는 누군가 거칠게 엄마를 흔드는 손에 의해 깨어 일어난다. 아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 꽁지야, 꽁지야, 왜 그래? 정신 차려! 위녕, 엄마는 단 영점 일 초의 생각할 시간도 없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쳤어. “숨을 쉴 수가 없어, 숨을 쉴 수가 없어…. 곰탱아 날 여기서 내보내줘! 제발 날 여기서 내보내줘!!!!!!!”

그것은 우리 두 부부의 6개월 만의 대화였고, 그리고 마지막 대화였단다.

위녕, 돌이켜 생각해보면, 네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었단다. 네 외할아버지도 엄마를 사랑했었지. 몹시도 사랑했단다. 하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랬던 거야. 다른 것이 틀린 것이라고 믿었던 거야.
 
위녕, 너를 보내고 싶지 않단다. 너에게 못 해준 많은 것들을, 이제 어여쁜 여자로 서 있는 너와 하고 싶었어. 여행도 가고, 백화점도 가고, 함께 책도 읽고, 맛있는 것을 먹고, 널 내 곁에 꼭 붙여두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야.
 
이 편지를 쓰기 전 엄마는 잠이 안 와 거실로 나갔다. 겨울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서 있다가 문득 돌아보니 자그마한 성모상이 서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엄마는 그제야 깨달아버렸다. 달빛 아래서 엄마는 거실바닥에 엎디었지. 그녀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그 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놔두었다는 거라는 걸, 알았던 거야. 모성의 극치는 보내주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실에 엎디어서 엄마는 깨달았다. 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은총이라는 것을 말이야.
 
사랑하는 딸, 너의 길을 가거라. 엄마는 여기 남아 있을게. 너의 스물은 엄마의 스물과 다르고 달라야 하겠지. 엄마의 기도를 믿고 앞으로 가거라. 고통이 너의 스승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거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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