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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동아 입찰 막으려 비공개 회의”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마침내 발주처는 앞서 밝혔던 대로 81년 11월, 20개사를 예비심사 합격업체로 발표하고 82년 10월, 최종 입찰을 실시했다. 최종 입찰은 절차도 복잡했다. 입찰 서류는 발주처가 있는 벵가지와 트리폴리로 각각 나누어 직접 제출하고 여기에서 살아남는 마지막 4개 회사가 다시 런던에서 협상에 돌입하는 것이다. 피를 말린다고 했지만 리비아로서는 독자적인 심사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입찰하는 회사들을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입찰이 있어왔고, 그때마다 입찰 경험이 있는 업체들은 리비아의 방식이 사회주의의 독소라고도 했지만 카다피 대통령의 뜻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는 최원석 회장은 카다피 대통령이 배격하고 있는 첫 번째가 무엇인지 몰라서 나오는 불만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카다피 대통령과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누고 기념 촬영하는 최원석 회장. 두 사람은 가족들 얘기도 자주 나누었다.

“리비아는 삼성을 포함해 유럽권에서도 여러 업체가 초기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카다피 대통령하고 깊이 있는 대화는 해보지 못했을 겁니다. 나는 몇 차례 카다피 대통령한테서 직접 통치철학이라 할 수 있는 그분의 뜻을 전해 들었는데, 자신이 직접 썼다는 『그린 북(The Green Book)』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만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비리 추방’이라는 겁니다. 비리 추방을 하지 않고서는 큰 국가를 건설할 수 없고, 절대 인민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한다는 걸 굉장히 강조합디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동 산유국들이 카다피의 청렴성을 평가하고 지지했기 때문에 공직자 부패가 거의 없는 건데, 입찰처를 분산시키고 몇 번씩 심사와 네고를 하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거지요.”(최원석 회장)

공직자들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비리를 차단하기 위해 입찰 창구를 분산시킬 만큼 철저하게 국가를 경영하는 카다피가 권력세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최 회장에게 덧붙여서 물어보았다.

“카다피, 아들에 승계 안 할 것”

“권력승계 문제는 내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항간에는 카다피 대통령이 둘째아들 사이프한테 정권을 승계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거의 잘못 짚었다고 봐요. 내가 알기로 최소한 카다피 대통령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 거지요. 나는 사이프에 대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얘기를 들었고 그 후 스위스 제네바대학에 유학했다가 미국하고 관계 때문에 영국 런던 정경대학으로 옮겨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알아요. 그래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에도 능통하다고 하는데 리비아 젊은 층에 인기가 대단하다고 합디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리비아 국민이 사이프를 선택한다면 그건 모르지요. 그렇지만 카다피 대통령이 직접 권력 승계를 생각하느냐, 아닐 거라는 겁니다.”

올해 39세인 사이프 알 이슬람은 1997년에 설립한 ‘카다피 국제자선재단’ 총재직을 수행하고 있다. 정부 공식 직함은 갖고 있지 않지만 서방 기업들을 상대로 리비아 투자를 설득하기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쿠데타를 한 사람은 권력의 공포도 알기 때문에 대부분 권력을 세습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카다피 대통령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동안 ‘그린 공화국’ 건설을 웬만큼 성공시켰고 전 세계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카다피가 언젠가 그럽디다. ‘지도자라는 건 기업체의 회장 같은 게 아니다. 영원한 것도 아니고 상속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인데 카다피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세습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니라고 보는 거지요. 모든 게 인민의 뜻이 담겨야 된다 해서 ‘자마히리야(인민권력)’라는 헌법까지 만든 양반 아닙니까. 인민들이 사이프를 선택한다면 그건 반대하지 않겠지요.”

82년 10월, 최종 입찰 준비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모든 업무가 보안이라는 울타리 속에 철저히 갇히게 됐다. 입찰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들이 최 회장의 지휘하에 움직였고 명예회장실로 들어가는 보고서도 최 회장 손을 반드시 거치도록 하고 있었다. 오전에 회의를 하면 오후에 입찰가가 날개를 단 듯이 날아다니더라는 것은 소름이 돋을 일이었을 것이다. 최 회장은 보안의 중요성이 갈수록 더해지더라고 회고했다.

“그 시점에는 이미 프라이스 기술진 2~3명이 우리 대한통운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기술지원을 하고 있을 때고, 프라이스와 쌍벽을 이룬다는 아메론사가 다른 업체 협력사로 결정됐다는 풍문이 떠돌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보안이 생명인데 어찌된 노릇인지 오전에 입찰가 규모를 논의하면 오후도 안 돼서 소문이 돌아요. 그래서 내가 정말 우려한 것이 입찰가에 대한 보안이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입찰 내정가를 정하지도 않았는데 60억 달러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심지어 우리하고 경쟁했던 현대 56억 달러, 대우가 45억 달러로 입찰가를 낼 거라는 소문이 나에게도 들어오는 겁니다. 전부 부풀려서 상대를 죽이자는 전략인데 그 정도였으니 뭐 얼마나 입찰 정보가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잖아요?”

설계도면도 82년 10월 입찰 시점에 맞춰 펜을 놓고 덮었다. 본사 몇 층에서 누구와 내정가를 조율하고 있는지조차 비밀이었고 최 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김광희 전무(전 동아증권 사장)도 내정가만은 접근이 불허됐다고 했다. 그토록 겹겹이 보안을 취하고 모든 입찰 서류를 갖추게 됐을 때 그 양은 무려 트렁크로 11개나 됐다. 대수로 공사의 규모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여기서 또 생긴다. 그동안 외압이 계속됐기 때문에 예상했던 일이었다고는 했지만 입찰하려고 했을 때 정부 측에서 제동을 걸고 나온 것이다. 최 회장은 거대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고 한동안은 정부 청사 쪽을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이다.

“그건 내 입으로 얘기하기도 싫어요. 이미 최종 입찰자격을 얻어 입찰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정부가)그동안 힘을 보태주는 건 고사하고 동아는 입찰을 못하도록 막고 있었으니 말이오.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외교력을 발휘하고 장관들이 업체를 대신해 로비까지 하고 그랬는데 우리 힘으로 돌파하고 나니까 입찰하지 말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무슨 놈의 나라가 이런 나라가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 아니겠소. 나중에는 정부에서 회의가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무슨 회의가 필요하겠어요. 해봐야 목적이 뻔한 건데. 나오라고 하니까 김교련 사장한테 참석하라고 했지요.”

이미 동아건설·대한통운·동아콘크리트가 컨소시엄으로 입찰하게 돼 있는 마당에 정부가 제동을 건다고 해서 최 회장이 스스로 나서서 외압을 막아야 한다거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콘크리트 김교련 사장이 나설 일이었을 것이다. 김교련 사장의 회고.

“리비아 공사에 입찰하려고 했을 때지요. 최 회장도 참 난감하고 불쾌했을 겁니다. 공산권에 진출할 수 있는 면허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우리 정부가 동아를 참여 못하게 하려고 했단 말입니다. 경쟁업체의 방해와 로비가 정부에 먹혀들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건 억장이 무너질 일이고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카다피 대통령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 그는 리비아의 개혁과 개방을 주창하면서 아버지를 설득해 핵무기를 포기하고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리비아의 젊은 층에 인기가 높아 차기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서방 언론들은 보고 있다.

결론은 “모두 다 입찰하라”

-정부 측에서 동아 때문에 회의를 했습니까?
“그런 회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비공개 회의를 했지요. 당시 경제기획원장관실에서 열렸는데 김준성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나웅배 재무부 장관, 리비아가 사회주의국가라고 해서 유학성 안기부장, 금진호 상공부 차관, 그리고 대우의 이 사장, 현대는 프라이스 사장이 왔을 때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명박 사장이 안 오고 다른 사람을 참석시켰고, 동아는 내가 나갔지요. 그때 표면상 내세우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동아는 진출권이 없다.’ 이거였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진출권을 리비아가 막았습니까? 오히려 권장하고 독려해야 할 정부가 앞길을 막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비공개회의 목적이 동아 때문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사실이지요. 리비아가 사회주의국가라고 유학성 안기부장이 참석했을 정도니까 동아 때문에 열린 게 아니면 그런 회의는 필요 없지요. 당시 진출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건 동아만 해당됐으니까요. 김준성 부총리가 맨 처음에 나한테 대뜸 그럽디다. ‘동아는 사회주의국가에 왜 들어가려고 해요?’ 그럼 이미 들어가 있는 업체한테는 왜 안 묻습니까? 내가 어처구니없어서 쳐다보고 있으니까 ‘더구나 리비아에는 이미 경쟁업체가 넷이나 진출해 있는데.’ 그래요. 넷이라는 건 한양까지 말하는 겁니다. 그 당시 한양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동아는 이미 선두그룹에 뽑혔고 최종 입찰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게 세계적인 대형 공사인데, 동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따야 하지 않겠습니까. 넷 아니라 40개 업체가 들어가 있으면 어떻습니까. 참여할 수 있으면 해야죠.’ 그랬더니 째려보면서 자꾸 사회주의국가라는 걸 강조하는 겁니다.”

-김 사장님한테만 계속 질문을 했습니까?
“그게 동아 때문에 열렸다는 걸 다시 입증하는 거지요. 나중에는 호통 치듯이 그래요. ‘동아는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진출권이 없잖소. 정부에서 4개 업체에만 허가를 해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뭘 40개가 들어가면 어떠냐고 그런 소리요. 그러고 동아가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 뭘 알아요?’ 아주 강하게 나왔습니다. 김준성 부총리라고 하면 경제계에서도 만만하게 보지 못하던 사람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하는데 내가 잠자코 있을 수 있습니까?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선 저한테 말씀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에서 저만큼 알고 저만큼 경험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김 부총리가 아주 아니꼽다는 표정입디다. 그때 유학성 안기부장이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김 부총리 발언을 막았어요. 저에 대해서 잘 알기도 했지만 국가 차원에서 지적을 하시는 겁니다.”

-어떤 내용으로 말입니까?
“유 부장님이 분명하게 그럽디다. ‘김 장군한테 사회주의국가를 모른다고 하는 건 우리 정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얘깁니다. 지금은 동아 사장이지만 공산당 문제라면 누구보다도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고 대한민국의 국가지보(國家之寶)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정부가 최고훈장을 수여했는데 그래 말씀하면 됩니까.’
그러니까 일순간에 회의 분위기가 아주 싸늘해집디다. 대우하고 현대가 제동을 걸려고 뭔가 준비를 해온 것 같은데 찍소리 안 하고 부총리도 주춤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동아에 공산권 진출 면허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미 상공부에서 턴키베이스로 들어가게끔 진출권 허가를 받았습니다. 상공부에서 받으나 건설부에서 받으나 대통령 재가인데 건설부 허가만 대통령 재가입니까? 여기 있으니 보십시오.’ 허가 받은 걸 내보였더니 완전히 당황하고 ‘어? 이게 뭐야. 이런 게 있었어?’ 그러면서 전부 금진호 차관을 쳐다보는데 금 차관도 옳은 판단을 한 거지요. 공사를 따내는 게 중요하지 우리 정부가 왜 막습니까. 결국 기업체 사장들은 다 나가라고 그럽디다. ”

마침내 최 회장은 리비아와 런던으로 향하는 7명의 TF팀을 선정하고 그중에는 동아건설 사장으로 있던 동생 최원영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누구도 알 수 없게 입찰 내정가를 담은 봉투 3개를 내미는 것이다. 최 회장은 고민 끝에 자신만의 보안을 생각했고 이것이 흥미있는 비화가 되기도 했다. 최 회장의 회고.

“입찰 직전에는 누구도 봉투를 열어보지 못하게 하고 봉투마다 내정가를 다르게 적은 액수를 넣었지요. 보안 유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 내부에서 새나간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 7명이 리비아로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가는데 그 과정에서 보안에 대한 인식이 흐려질 수도 있고, 특히 대한통운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입찰 준비를 해온 프라이스 팀도 있었거든요. 그러니 그땐 전부가 경계 대상입니다. 그럴 정도였어요. 그러고 내 나름대로 막판까지 정보를 취합해 변경해야 될 경우도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봉투 3개를 줬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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