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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산다>17.제주 중산간마을 정착 사진작가 姜泰吉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종려.야자나무가 南國을 연상케하는 제주공항을 빠져나와 제주도동쪽지역에 위치한「中산간마을」(북제주군표선면성읍2리)을 찾아나섰을 때 화려한 봄의 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지난 겨울의 흔적은「화산석」으로 이뤄진 낮은 돌담을 에워싼 억새 풀에나 언뜻 남겨져 있었다.
초록잎에 둘러싸인 노란 귤과 벙긋벙긋 꽃망울을 터뜨린 빨간 동백꽃이 키가 작은 돌담집 안마당에서 남쪽 섬마을 제주의 멋을뽐내고 있었다.
「서울내기」 사진작가 姜泰吉씨(42)의 집은 얼룩빼기 젖소 목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파란 초원 한켠에 기생화산인「오름」을 배경으로해 서 있었다.姜씨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한시간을 날아오면 같은 우리땅 그러나 전혀 다른 자연이 그려 져 있는 이곳에「미쳐」 주저앉은 사람이다.
86년 제주에 여행왔다가 「오름」의 부드러운 능선,그 가슴팍에 숨겨져 있는 童子石과 묘지를 카메라 앵글에 잡아넣던 그는 제주의 자연을 필생의 테마로 삼고 싶다는 욕심이 솟구침을 느꼈다. 멀리 흰눈을 이고 선 한라산 허리아래로 파란 봄이 무르익었던 4월의제주섬에 반해 그는 6개월을 고민하다 결국 그해 10월 짐을 정리해 서울을 떴다.
『3년만…실컷 제주를 찍고는 돌아가겠다』고 아내(金英姬.37)를 달래 서울 전세방을 빼 서귀포에 방을 마련했다.
79년 중앙대 사진학과를 나온후 7년간 프리랜서로 일했던 그는 산과 바다,아열대 식물이 조화를 이루는 제주의 산하를 대한후「무엇을 찍고 살것인가」방향이 잡히더라고 했다.
아내와 어린딸을 서귀포 전세방에「담아놓고」 혼자 화산폭발의 흔적을 안고 있는 돌무덤,독특한 기분을 전해주는「오름」의 봉우리를 기어오르길 수십,수백차례,그의 결론은 3년갖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앞날을 위해 현재의 성읍민속마을이 멀지않은 성읍2리에 평당 3천원을 주고 3천평의 땅을 마련했다.
그들의 생각은 머지않아 영구거주로 바뀌었고 그의 아내도 이미변해 있었다.
잡지등에 사진을 넘겨주고 받은 것으로는 생활이 안된다는 것을뻔히 안 그의 아내는 5년전 성읍에서 30여㎞ 떨어진 제주시내에 어린이 학원을 차려 생계를 떠맡고 나섰다.
제주생활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재작년 이곳에 있던 농가를 헐어 구멍이 송송 뚫린「화산석」을 붙인 단층집을 지었다.사진 암실과 살림방이 있는 35평짜리 이집의 대청마루에서는 앞뒤로「오름」을 볼 수 있었다.
뒷마당에서 아예「오름」에 오를 수 있었고 앞마당에서도 역시 멀리 서있는「오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지난 90년에 서울에서「오름展」을 갖고 91년에는「童子石展」을,그리고 올해들어 이미 두차례 단체사진전에 출품한 그의 작업시간은 주로 해가 뜨고지는 새벽과 저녁.
광선으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모습의「오름」을 찍기위해서다. 화산이 폭발했을 당시 지표가 함께 끓어올랐던 흔적이라는「오름」은 제주에 모두 3백60여개.그는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한 이「오름」을 찍기위해 바쁘다.아내와 딸아이(제주신광국교 4학년)가 직장과 학교때문에 제주시에서 주중을 보낼 때 그는 홀로 이「오름」을 기어오르느라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집마당 가득히 5천그루의 비자나무 묘목과 팽나무.동백도 곁들여 심었다.마당 한켠에서는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뒷마당에 원두막같은 정자를 지어 자연속에서 친구들과 술한잔 기울이기엔 더할 수 없이 좋다 는 것.
서울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며칠씩 있다가면 한동안 싱숭생숭 서울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도심을 활보할 수 있다.친구들이 아이의 교육문제를 걱정해 줄라치면 그는 아예말문을 닫게 한다.
그자신은 자연속에 자란 딸아이의 인생이 누구보다 풍요로울 수있다고 장담하기 때문이다.그의 아내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자연을 읊은 아이들의 글짓기실력이 놀랍더라며 자연이 아이들의 가슴에 맑은 샘을 심어준 것같다고 했다.
〈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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