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미 요구와 대응자세(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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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이 일본을 향해 슈퍼 301조라는 대포를 겨냥해놓은 상태에서 우리에게도 자동차관세율 인하 등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대체로 한국의 개방스케줄에 대해 만족을 표시해왔다. 따라서 이번 한미 통상협상에서 당장 가시적 불안요인이 등장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지속적으로 자동차·통신 및 지적재산권 등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고,특히 한국의 제도와 관행의 개선까지 요구하고 있어 이 부문에는 세심한 대응이 필요하다.
미국이 우리를 보는 시각에는 다분히 제2의 일본이 아니냐는 인식이 많다. 이점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본처럼 정교한 국내거래 조직,거미줄같은 유통망과 관행을 갖고 있지도 못하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국산 자동차에 대해 현행 수입관세율 10%를 미국 수준인 2.5%로 낮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유럽이 외국산 자동차에 부과하는 세율이 10%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이다. 미국은 이밖에도 자동차에 부과하는 세금체계,즉 특소세와 배기량에 따른 지방세 등도 시비를 걸고 있다. 관세율 조정도 경우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지만 국내법을 고쳐 외국산에 특별대우를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미국의 의도는 미국산 자동차의 한국시장 점유율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번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조건을 모두 수용할 수 없다해도 그 메시지 뒤에 숨은 뜻을 잘 새겨봐야 한다. 이제 한국의 기업들은 외국기업과의 경쟁에 점점 더 노출될 수 밖에 없다. 그 경쟁무대가 국내시장까지 미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30여년간 한국의 소비자들은 수출위주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수출상품을 지원하기 위한 희생을 강요당해온 측면이 있다. 높은 가격과 질 나쁜 물건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국제화된 환경에서는 경쟁력 강화도 중요하지만 소비자의 편익증진이 또 하나의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협상만으로는 도도히 밀려오는 개방요구에 대응할 수 없다. 국내 기업간의 경쟁을 가속시켜 체질강화를 꾀해야 하는데 이것마저 시간에 쫓기고 있다. 더 나아가 질 좋고 값싼 상품을 쓰기 원하는 국민의 요구도 높아가고 있다. 아직까지 개방은 되었으나 수입자체가 독과점 구조이고,유통단계가 왜곡되어 개방의 혜택이 골고루 퍼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이점에도 유의해 수입과 관련된 국내 제도의 과감한 정비에 나설 필요가 있다. 대세를 감안할 때 어떻게든 국내 기업이 가져야 할 자세는 값싸고 질좋은 상품과 서비스로 경쟁하는 것이며,정부나 국민들에게 더이상의 지원을 기대해서도 안되고,또 할 수도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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