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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저주, 그리고 예수의 저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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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내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이 바위 밑에,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13개의 코우덱스를 담은 항아리가 묻혀 있었다『. 백제서기』가 쓰인 근초고왕 시기에 이 항아리는 지하의 침묵으로 들어갔다『. 삼국사기』의 기초사료가 된『서기』는『 사기』가 완성된 후 김부식의 손에 의하여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일까? [임진권 기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파바우 수도원 본부로 돌아가야 한다. 아타나시우스 대주교가 27서 정경목록을 발표한 바로 그 서한은, AD 367년 3월 말 아타나시우스의 피난생활을 목숨 걸고 지켜주었던 수도승들의 거점인 파바우 수도원 본부에 전달되었다(본지 6월 3일자 제5편 ‘파바우 수도원 본부’ 참고). 그 서한에는 ‘외경적 텍스트를 읽어서도 아니 되며, 소장해서도 아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바우 주변으로 약 7000여 명의 남녀 수도승이 있었고 그들의 센터 역할을 했던 파바우 수도원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그 도서관에는 수많은 성경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서가 양피지(소·양 가죽)를 소재로 쓴 것과는 달리, 그 문서들은 대부분이 파피루스 코우덱스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본부 이외의 수도원에도 많은 성경문서들이 있었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타나시우스의 친구였던 파코미우스(약간 연상)는 바로 이 수도원 본부에서, 346년 5월 9일 이 지역을 휩쓴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스승은 이승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의 헤구멘(스승) 파코미우스의 친구며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의 교지를 그들은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상황은 정확한 문서기술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밀한 재구성이 불가능하다. 나그함마디보다 하류에 위치한 아비도스 신전은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존숭된 이집트 고대왕조의 종묘이다. 그 종묘의 ‘제왕화랑(Gallery of the Kings)’에는 세티 1세가 맏아들인 미래의 람세스 2세를 교육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람세스 2세는 모세와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람세스 2세는 양피지 문헌을 들고 있는데 그 속에는 역대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이 모두 벽면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자료는 이집트 역사를 구성하는 데 결정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와 같이 이집트인들은 문서와 역사의 소중함을 알았다.

나그함마디보다 하류에 위치한 아비도스 신전은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존숭된 이집트 고대왕조의 종묘이다. 그 종묘의 ‘제왕화랑(Gallery of the Kings)’에는 세티 1세가 맏아들인 미래의 람세스 2세를 교육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람세스 2세는 모세와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람세스 2세는 양피지 문헌을 들고 있는데 그 속에는 역대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이 모두 벽면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자료는 이집트 역사를 구성하는 데 결정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와 같이 이집트인들은 문서와 역사의 소중함을 알았다.

물론 갑자기 외경화되어버린 문서들을 불살라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정성을 들여 번역하고(희랍어에서 콥틱어로), 수집하고, 파피루스에 쓰고, 제본하고, 가죽 포장지로 싼, 그들의 피땀이 서린 소중한 문서들을 단숨에 말살시키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못했다. 분명 그들은 아이코노클래즘(형상 불인정)이라는 단순한 이념적 명분 때문에 바미얀 대불을 폭파시키는 탈레반 미치광이들보다는 현명한,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수도승들이었다. 초기기독교는 현금의 극단적 유일신론의 세뇌 아래 미치광이 전도주의의 말폐에 빠져버린 그런 세속종교가 아니었다. 그들은 조용히 영적 해탈을 추구하는 수도집단이었고, 문서의 권위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면을 갈구하는 숭고한 영혼들이었다. 따라서 외경화된 문서에 관하여 보다 관대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서관 문서의 처리방안에 관하여 회담을 거듭했다. 역사적 상황은 변할 수도 있다. 그들이 내린 최종 결론은 이 외경문서 코우덱스를 우선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감춰두기로 한 단안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도 그 많은 문서들이 토벽 속에 숨겨졌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이 이 문서들을 숨기기로 한 곳이 바로 게벨 알 타리프(Gebel-al-Tarif) 절벽 산기슭이었다. 이 절벽산 주변에도 파코미우스의 스승인 팔라몬을 기념하는 수도원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주변으로 토굴에서 수행하는 수도승들도 있었다. 그중 어느 한 승려에게 이 문서의 처리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13개의 코우덱스 문서를 붉은 토기항아리에 넣고 그 아가리를 사발로 덮은 후 가장자리를 천연 아스팔트 역청으로 완벽하게 밀봉했다. 그리고 그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위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 항아리를 묻었다. 묻은 사람은 언젠가 이곳을 다시 찾아와서 그 소중한 문서들을 가져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쿰란 동굴에 저장된 항아리문서와 달리 이 항아리는 흔적도 없이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1945년 12월 무함마드 알리의 동생 마지드의 우연한 곡괭이질에 이 항아리가 걸리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몇 천 년을 더 침묵 속에 보내야 했을지. 아니면 영원한 태허(太虛) 속으로 언어의 형상을 남기지 않은 채 기화(氣化)되어버렸을까? 알리의 피비린내 나는 패밀리 퓨드(family feud) 복수극(5월 13일자 제2편 ‘함라돔의 피비린내’ 참고) 후에 과연 이 코우덱스는 어떠한 여로를 더듬었을까? 알리 엄마 손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이 코우덱스가 골동품이라는 것 정도는 알리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팔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질 않았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여 한 만원 정도만 달라고 애걸하였어도 천원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담배 몇 개비와 귤 몇 개와 바꿔치기하여 몇 개는 알리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복수극으로 인하여 경찰의 집 수색이 시작되었고, 경찰에게 이 코우덱스 문서를 빼앗기기는 싫었던지라 담배 몇 개비에라도 서둘러 팔았던 것이다. 제3 코우덱스(Codex Ⅲ)의 경우, 알리는 그것을 동네에 있는 콥틱 크리스찬 교회로 가지고 갔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 보호령이었다. 영국 통치자들은 종교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무슬림 경찰들로 하여금 콥틱 기독교인을 거칠게 다루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콥틱 교회는 안전한 조계 같은 느낌이 있었다. 코우덱스를 어떤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이 문서는 아랍어가 아닌 콥틱어로 쓰였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콥틱 교회에 가면 이 문서가 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알리는 제3 코우덱스를 안전하게 맡아달라고 교회에 부탁했다. 교회 사제는 이 제3 코우덱스를 중등교사였던 좀 유식한 처남 알키스(al-Qiss)에게 보여주었다. 알키스는 여러 콥틱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던 순회교사였는데, 그 역시 이 문서를 알아볼 만한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콥틱어를 전공하는 게오르기 베이 소브히(Georgy Bei Sobhy)라는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베이 소브히는 이 코우덱스에 들어있는 요한 비서(The Apocryphon of John), 이집트인 복음서(The Gospel of the Egyptians),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The Sophia of Jesus Christ), 구세주의 대화(The Dialogue of the Savior) 등을 보고 경악했다. 으악! 태고의 문서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해방 후 혼란기에 전설적인 『백제서기』를 발견한 듯한 감격보다 더 짙은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베이 소브히는 공포스러운 나머지 즉각 이 문서를 당국에 신고했다. 당국은 이것을 콥틱 박물관에 조회했고, 알키스는 이 문서를 콥틱 박물관으로 가지고 가야 했다. 박물관은 알키스를 형벌에 처한 것이 아니라 300 이집트 파운드를 주고 정식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박물관에는 50파운드를 세금조로 기증해야 했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한 5만원 정도 받고 8000원을 커미션으로 떼어준 셈이다. 4만2000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알키스의 가슴은 그나마 감옥에 안 가고, 다행스럽게 골동품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행복감에 두근거렸다. 돈은 혼자 쓱싹해버렸다. 이 매매를 신사적으로 알선한 사람은 카이로 콥틱 박물관의 관장 토고 미나(Togo Mina)였다. 구입일자는 1946년 10월 4일! 이 사건이 바로 이 문서가 인류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최초의 단서였다. 박물관 관장 미나는 매우 양심적인 인물이었고, 이 체노보스키온 문서의 보존역사에 있어서 유일하게 사심 없이 헌신한 인물이었다. 20세기 이집트학의 최대사건인 그 위대한 투탕카멘 왕릉 발굴에 돈을 댄 카나본 경(Lord Carnarvon)도 투탕카멘의 뚜껑이 열린 직후 사망했다.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소문이 돌았다. 토고 미나뿐 아니라 이 문서에 손을 댄 많은 사람이 이유 없이 죽어갔다. ‘예수의 저주(The Jesus Curse)’라는 소문이 돌았다. 중앙SUNDAY 구독신청 [J-HOT] ▶ '지단 박치기' 때 마테라치가 한 말 드러났다▶워런 버핏 "지금 주가 폭락, 한차례의 호들갑"▶생존위기 몰린 동네 목욕탕 ▶李·朴 투표용지 촬영 놓고 '정면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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