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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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다음날 우리는 모두 외가로 갔다. 학교만 다녀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틀어박히는 둥빈의 방 밖에서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미운 건 미운 거고, 외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야…. 암이시래. 너희 방문이 외할아버지에게 얼마나 힘이 되겠니? 어서 나와.”
 
하는 수 없이 방문을 열고 나온 둥빈의 눈길에는 슬픔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 둥빈의 눈빛을 바라보며 내 가슴이 철렁했다. 둥빈의 아빠가 죽던 날, 무심한 목소리로 “누나, 해리포터 6부는 언제 나와?”라고 묻던, 둥빈의 목소리를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떤 목소리보다 담담했던 그 슬픈 목소리를……. 엄마의 차로 가는 길에 둥빈이 내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외할아버지…, 심하신 거야?”

변성기가 되느라 걸걸해진 그의 목소리는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조기 검진에서 발견하셔서 괜찮대. 게다가 나이가 들면… 암도 늦게 퍼진대.”
 
엄마 차 안에서 둥빈은 창밖만 보고 있었다. 암 검진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버린 그의 아빠를 나 또한 생각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둥빈을 많이 닮았다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둥빈을 위해 기도했다. 지금 이 순간, 솔직히 외할아버지보다 둥빈이 더 걱정스러웠다.

우리는 함께 회를 먹으러 갔다. 고단백에 저지방을 고민하던 엄마가 내린 결론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외할아버지의 얼굴은 병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의식적으로였는지 일부러 더 쾌활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엄마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던 외할아버지가 이미 무슨 일인지 다 들으셨다는 듯이 둥빈에게 말씀하셨다.

“둥빈아, 너도 곧 중학생이 되는구나. 어린아이가 아니고, 남자가 되는 거야. 그러면 매사를 남자답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남자답다는 것은, 이런 거야. 가령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아는 거지. 사내 녀석이니까 가끔 누구랑 싸울 수도 있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말이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다든가,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다, 이러는 게 아니야.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어쨌든 너를 한 대 때릴 것이라는 것을 그 순간에도 분명히 아는 거야.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왜 그러는지를.”

둥빈은 말이 없는데 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머니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둥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나 제제와는 달리 둥빈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컸다. 엄마를 위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어린 둥빈을 이 년 동안이나 키워주셨던 것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외할아버지는 큰 수술을 받는다. 의학적으로 어느 정도는 보장이 되어 있다고 해도, 할아버지는 수술 중에 죽을 수도 있단다. 어쩌면 너희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어.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슬퍼하지만은 말아라. 니 에미에게도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그리고 재미있게 후회 없이 살았다. 그래서 이제 이 나이에 어떤 일도 받아들일 수가 있단다. 비록 재산은 많지 않고, 비록 이 세상에서 큰일은 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올바른 쪽에 서려고 했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생각해보면 아주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되게 해준 너희에게도 감사한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정말로 담담했다. 엄마에게도 밴쿠버에 잘 다녀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죽는다는 것도 삶의 일부야. 잘 사는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는 거지. 누구나 한 번은 죽으니까….”
 
외할머니가 우리의 눈을 피해 얼른 눈물을 닦으셨다. 엄마가 당황하면서 “아빠 그만하세요, 둥빈이 장가 가는 것 보실 텐데요, 뭘”이라고 했다. 그러자 둥빈이 대꾸했다.

“할아버지 저는 결혼 안 해요.”  

27일까지 독후감 받습니다
 
숱한 화제 속에 연재 중인 공지영 가족소설 ‘즐거운 나의 집’이 이달 말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5개월 넘게 이어진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중앙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호응에 보답하고자 공지영 작가와 함께 ‘즐거운 나의 집’ 독자 독후감을 받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 재미를 글로 적어 보내주십시오. 가족의 화해와 사랑에 얽힌 사연,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경험담 등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즐거운 나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면 모두 환영합니다. 공지영 작가가 직접 심사를 합니다. 200자 원고지 6장 내외(A4용지 10포인트 3/4 분량)의 원고를 이달 27일까지)로 보내주십시오. 형식은 자유롭습니다. 선정된 원고는 본지에 게재되며 소정의 고료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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