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양심 저버린 「가명의 탈」/이경철 문화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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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일균·정인찬·정휘립씨. 이 세사람은 이름만 다를뿐 실은 동일인이다. 94년도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주소를 전주시 삼천동이라고 밝힌 정일균씨는 중앙일보에,전주시 덕진동이라고 밝힌 정인찬씨는 다른 일간지에 당선됐다. 그리고 정휘립씨는 지난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됐었다. 당선작·이름·주소가 각기 다른 이 세 정씨들은 그러나 얼굴사진과 55년 출생해 현재 전북대·전주대 영문과 강사라고 밝힌 약력은 같다. 진짜이름은 정일균.
그는 실명제 시대에 철저하게 뒤틀어진 가명의 탈을 쓰고 신춘문예 당선을 긁어모으려한 것이다. 문학도에게 공개적이면서도 권위있는 문단 등단 기회를 주기 위해 신춘문예는 철저하게 작품위주로만 심사한다. 작품만 보고 사람은 따지지 않는 신춘문예의 특성이 정씨로 해서 그대로 제도상의 허점으로 드러난 아픈 경우다. 중앙일보는 신춘문예 공모 사고에서 『같은 부문에서 타 신춘문예와 동시 당선될 경우 낙선으로 처리함』이란 단서를 분명히 밝혔다.
그래서 정씨의 당선을 취소했다. 한명이라도 더 새로운 얼굴을 문단에 내밀기 위해 심사가 끝나면 각 신문 신춘문예 담당자들은 크로스체크를 통해 당선자 발표전에 같은부문 중복 당선자를 가려 낙선시킨다. 정씨의 경우 서로 다른 이름과 주소를 사용해 이 크로스체크를 통과했다. 당선자가 발표된뒤에야 사진과 약력으로 동일인임이 드러나 당선이 취소된 것이다.
스스로 별 볼일 없다고 생각되는 문예지로 등단했을 경우 권위를 찾기 위해 다시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릴 수는 있다. 신춘문예를 통해 나온 기성문인이 장르를 바꿔 다시 신춘문예에 응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단에서 인정하는 권위있는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해 어엿이 등단절차를 거친 문인이 같은 장르로 신춘문예를 기웃거리는 것은 문단 관례상,그리고 문인으로서의 양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금을 위해 혹은 스포츠에서처럼 다관왕을 과시하기 위해 이 신문 저 신문 신춘문예에서 당선을 따내는 기성문인들의 행태는 해마다 신춘문예 철이면 원고지 앞에서 자신의 삶과 사회의 의미를 찾는 수만 문학도들의 고통스러운 문학에의 꿈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에 문학적 열기를 불어넣고 그 열기를 후끈하게 문단으로 연결시켜 문학과 문단을 지탱하는 신춘문예의 존재이유를 허무는 반문학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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