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실패한 지상낙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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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반도 북쪽의 지상낙원 예찬자들이 풀죽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50년 가까이 오류 한점없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고 자화자찬만 해오던 북한이 9일 발표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보고를 통해 정권수립 이래 처음으로 실패를 자인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순종으로만 길들여온 북한동포들의 눈과 귀도 장미빛 선전만으로는 더이상 가리울 수 없을 만큼 북한이 절박한 처지에 빠져있음을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중앙위원회 회의결과에서 두드러진 점은 93년에 끝나도록 되어있는 3차 7개년 경제계획을 예정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됐음을 인정한 것 외에 전통적인 중공업 우선정책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점과 당·행정부의 인사개편 등 세가지 변화다. 이 특징들은 앞으로 북한의 대내외 정책은 물론 대남정책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것이다.
우선 관심을 끄는건 「세상에 부러움없는 낙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믿는 것처럼 보여온 북한 인민들이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점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그 반응에 따라 북한체제의 안정에 영향을 주는 이완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계획실패의 원인으로 소련 등 사회주의권 시장의 붕괴와 한반도의 전쟁위험에 따른 방위력 강화를 들고 있기는 하나 공산권의 붕괴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불굴의 승리만을 장담해오던 북한 당국자들에게 이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길이 선전·선동면에서 뻔뻔스러울 정도이 강심장을 가진 체제가 실패를 자인했다는 것 자체가 더이상 주민들에게 숨길 수 없을 만큼 경제상황이 심각함을 반증하고 있다. 보고문중에 「근년중에 모든 사람이 흰 쌀밥과 고깃국을 먹고,비단옷을 입고,기와집에 산다는 인민의 숙원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는 구절이 몇년째 반복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목표달성이 요원함을 스스로 밝힌 것이나 진배없다.
그 심각성은 전통적으로 북한이 추구해오던 군사부문 위주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버리고 농업·경공업 우선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수출시장을 확대하고 대외시장을 적극 개척하겠다」며 무역 제일주의를 제시하고 있는데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북한이 그동안 표방해온 대외개방을 계속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책기조는 한반도 안정과 관련해 반가운 일이기는 하다. 인사개편에 있어선 남북한 대화와 관련있는 김영주의 재등장을 비롯해 개방에 비중은 둔듯한 측면이 보인다. 그러나 개방이라는 것은 국제적인 협력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북한 스스로 대외정책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 변화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핵정책이다. 그러한 변화없이 무역제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북한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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