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조심스레 현실론 모색/민감한 「쌀개방」… 묘책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쌀개방 시한이 오는 15일로 다가오는 가운데 이미 정부는 개방불가피로 방향을 틀었다. 극한투쟁을 불사하며 의원농성까지 돌입한 민주당은 대세가 어쩔 수 없이 개방으로 간다는 점 때문에 저지투쟁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고 정부의 총대를 메어야 하는 민자당은 지지기반인 농촌지역으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을 묘수를 찾아 고민하고 있다.
◎총공세속 「개방후 대책」 숙고/민주
쌀시장 개방저지를 위한 장외투쟁 선언에 이어 1일 철야농성을 하는 등 기세를 올리고 있는 민주당도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고 있다.
의원들 상당수가 공식 언급은 못하고 있으나 『불가피하게 쌀개방이 이뤄질 경우 그간의 공세가 오히려 야당의 부담으로 돌아올 부분도 있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60년대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베트남 참전 및 70년대 미국의 대한 섬유류 수입쿼타 규제협상 등 야당이 외교문제와 관련해 목소리를 높였던 사안들이 결국은 정부의 방향대로 갔던 점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에 양자택일을 촉구하며 「극한투쟁」을 하다 결국 모든 부담만 야당이 안고 꼼짝달싹 못하는 사태를 예상치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민주당이 최강도의 공세를 취하면서도 이 부분을 상당히 조심해가는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4일 발족키로 한 「쌀수입 개방저지대책위」의 명칭은 당초 고려됐던 「결사저지」라는 표현을 담지 않았다. 농성 결의문에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쌀수입 개방을 저지할 것』이라며 「절대」라는 표현을 삼가고 있다.
이기택대표도 지난달 30일 긴급 기자회견에서 『현 시점에서 쌀을 개방하고자하는 세력은 반민족적 행위자』라는 표현을 써가며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쌀개방은 막겠다』고 했다. 그러나 1일 농성 돌입시 이 대표의 격려사와 당 결의문에는 「반민족적」이라는 극한적 표현은 찾아볼 수 없고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표현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저지하겠다』는 어구가 들어가 있었다. 한 최고위원은 『정부 여당이 헤매고 있는데 야당마저 덩달아 흥분하면 안된다는 의견도 접하고 있다. 지금은 그런 단계가 아니나 앞으로는 개방결정후의 대책쪽에 초점을 맞추는 2단계 대응시점이 오게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시한인 15일까지 투쟁의 강도를 최고도로 유지하고 그이후 2단계 투쟁 대비를 고려치 않을 수 없는 속사정을 함께 안고 있는 것이다.<최훈기자>
◎대세 기울어 여론몰이 고심/민자
민자당은 대외적으로는 아직 쌀시장 개방 절대불가가 당론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이미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정부의 총대를 메주기로 결심한 듯하다. 김종필대표가 개방의 불가피성을 언급한데 이어 황명수총장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민자당은 2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쌀개방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쌀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안되도록 토의의제에서 빼버렸다.
이런 결정에는 물론 청와대의 뜻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측은 당의 농촌출신 의원들 모임인 농의회(회장 김종호 정책위 의장)가 여당 농촌의원들의 어려움을 들어 의총에서 쌀개방 반대결의를 해달라고 했을 때 『눈치없는 일을 하려한다. 더욱이 정책위 의장이 주동이 되다니 어이가 없다』고 매우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은 앞으로 쌀개방쪽으로 서서히 당론의 가닥을 잡아갈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김 대표가 총대를 메고 물꼬를 튼데다 청와대의 고민도 감지됐기 때문에 여당의 생리상 한번 꺾인 흐름을 역류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김 대표와 황 총장이 쌀개방의 불가피성을 거론한뒤부터는 당내의 개방반대 목소리는 움츠러들고 있다. 반면 『쌀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떤 것인 국익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김영구총무)는 등의 현실론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민자당의 고민은 앞으로 개방반대라는 당론을 어떻게 소리없이 바꾸어 개방불가피로 몰아가느냐에 있다.
지지기반을 농촌에 두고 있는 여당으로서 무조건 정부만 옹호해줄 경우 다음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사정과 그렇다고 대통령의 의사에 반대하고 나갈 수도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촌 의원들에게 명분을 주고 정부의 입장도 옹호해줄 수 있는 묘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민자당의 당론조정 시기는 정부가 개방을 먼저 선언한 직후 있을 것으로 보인다.<이상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