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방문 「실향민열망」 누가저버렸나/의혹커진 이특보 「훈령조작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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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 수정제의 수용” 훈령 왜 묵살했나/「거부 괴전문」·은폐여부에 관심집중
이동복 안기부장특보의 대통령 훈령조작설이 감사원의 감사를 받게 됐다.
민주당은 이미 이 특보의 해임을 요구한데 이어 20일 국회 청문회 개최를 제의하고 나섰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은 이부영의원(민주)이다.
이 의원이 폭로한 내용의 요지는 지난해 9월5일부터 1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8차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이 제안한 조건을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받아들이라고 했는데도 이 특보가 훈령을 조작해 회답을 결렬시켰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서류로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의 보고서」(92년 9월25일)와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 청훈관련 통일부총리의 입장」(92년 9월28일) 「이산가족문제 협상 경위와 내용」(92년 9월)의 요지를 공개했다.
당시 남측은 이인모노인의 북송과 ①고향방문단 실현 ②판문점 면회소 설치 ③동진호 선원 귀환 등 세가지 조건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북측은 동진호 선원 귀환을 제외한 두가지는 연내에 실시할 수 있다고 수정제의했다.
이 의원이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이에 남측 대표단은 17일 0시30분 서울에 이 조건을 받아들일지 여부에 대한 훈령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 특보는 같은시각 안기부 통신망을 이용해 『기존입장을 재확인해달라』는 청원을 독자적으로 서울에 보냈다.
남북대화지원본부장이던 엄삼탁 기조실장은 청훈 수신인인 통일원 부총리·외교안보수석·안기부장 등에게 정원식총리의 공식 청훈을 전달하지 않았다. 대신 이 특보의 요청대로 17일 오전 7시15분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협의하지 말라』는 괴전문을 평양으로 보냈다. 이것은 조작부분이다.
또 한가지는 훈령 은폐다. 17일 오전 10시가 지나 이상연 당시 안기부장에게 정 총리의 공식청훈이 전달됐다. 이 부장은 이날 오후 2시쯤 최영철 통일원 부총리와 김종휘수석에게 협의했다. 김 수석은 노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 북측의 수정제의를 받아들이라는 훈령을 이 부장을 통해 평양에 보냈다. 이 때가 17일 오후 4시15분. 그러나 이 특보는 이 훈령을 대표단에 전달하지 않아 회담은 깨졌다.
이 사건이 이 의원의 폭로대로 대통령의 훈령을 조작한 것이 사실로 판명되면 파문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가장 큰 열망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관계가 일부세력에 의해 왜곡돼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연루된 상당수 인물들이 교체·정비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또 하나의 큰 문제를 이미 드러내고 있다. 통일문제를 둘러싼 정부내의 뿌리깊은 노선갈등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리도 불가피하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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