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야 편한 「이웃」(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산업사회가 발달해 기술의 생산성이 높아갈수록 노동시간이 단축되며 이에 반비례해 여가시간은 늘어난다. 이같은 도식적 단순논리에 이론을 제기하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소득증대에 따라 소비가 늘고,그 늘어나는 소비에 대한 욕구충족의 재원획득을 위해 남은 시간을 다시 노동에 반납하게 되므로 개인적 여가는 오히려 축소된다는 것이다. 잔업도 하고 바이어를 만나 실적도 올려야 한다.
지난 81∼90년 사이 5차례에 걸쳐 서울대 신문연구소가 실시한 「국민생활시간조사」를 보면 그런 경향이 입증된다. 우리 국민이 일하고 밥먹고 자고 공부하는 평상시의 정해진 일과시간을 제외하면 평일 하루 평균 자유시간은 81년 5시간29분에서 계속 상향곡선을 이루다가 87년 5시간58분을 정점으로 다시 내리막 현상을 보이고 있다.
줄어들고 있는 여가시간이 모두 노동에 반납됐다고 볼 수 없다. 교통혼잡으로 출퇴근에 소모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동창모임·계모임·관혼상제를 통한 친구·친척 모임이 잦아진 것도 소득의 증가와 관련이 깊은 것이다.
다음은 짧아지고 있는 여가시간의 내용이 소득의 증가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보자. 직장에서 일과가 끝나면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낸다.
우리국민의 평일 TV 시청시간은 3시50분가량으로 통계되고 있다. 좀 일찍 귀가한다 해도 저녁식사후 취침시간까지 TV앞에 앉아 있는 셈이다. 동네마다 비디오가게가 2∼3개는 있다. 비디오 한편을 보기 시작하면 1,2시간은 그대로 간다. 공휴일이면 등산·낚시·골프로 종일 집을 떠나 시간을 보낸다. 자가용 승용차의 대중회로 여행·관광상품의 유혹도 만만치 않다.
시민의 53%가 이웃을 모르고 지내며,고급주택가에 사는 사람들 71%가 이웃과 전혀 접촉이 없다는 서울시민종합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짧아진 여가시간이 극히 개인적·이기적이며,쾌락적 소비주의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이웃을 찾아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겉으로 보기엔 소득이 별것 아닐 듯 싶은 사람들이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잘 사는 경우는 이들의 눈이 무서워서도 서로 외면하고 사는 것이 속편할 수도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