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화 시대 채권 시장 점검|매수세 끊겨 난조 오래 갈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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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금융 실명제의 전격적인 실시로 사채 시장이 경색되고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 가운데 실명제가 채권 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채권 거래란 각 기관·회사들이 발행하는 채권을 사면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이자와 함께 원금을 돌려 받는 금융 거래의 하나로 대부분의 채권이 무기명으로 거래가 가능해 왔기 때문에 예금 등에 비해 운용의 폭이 넓어 주식과 함께 대표적인 투자 상품으로 꼽혀왔다.
◇거래 현황=올 상반기 중 회사채의 경우 총 발행 규모는 8조1천4백78억원으로 지난해 보다 77.3%나 증가해 대표적인 기업 자금 조달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고 이를 사는 일반 투자자들의 참여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실명제가 실시된 13일 채권 시장에는 회사채 유통 수익률 산정의 기준이 되는 3년 만기 은행 보증 회사채 등 대표물은 팔자와 사자가 아예 없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주식의 경우 장이 열리자마자 팔자 물량은 무려 5천만주나 쏟아져 나오는 등 최악의 경우였지만 사자 물량도 50만주가 나오는 등 미약하나마 수급 형태를 갖춰 마감 때까지 1백35만주가 거래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주요 매매 세력인 은행 등 기관 투자가들이 실명제 실시에 따른 예금 인출 등에 대비, 채권 매수에 나서지 않았고 ▲채권의 실명 거래에 따른 불투명한 전망으로 매매 심리가 위축돼 이같은 현상이 빚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긍정적 요인=실명제가 실시되면 채권 시장은 주식 시장을 대신 할 수 있는 투자 수단이라는 점에서 활성화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채권의 경우 기관 투자가들의 비중이 높아 실명화율도 다른 금융 상품에 비해 높기 때문에 실명제에 의한 충격이 적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또 앞으로 부동산 투기 등이 힘들어지게 되면 비실명 채권들이 그대로 시장 내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높게 점쳐지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낙관적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부정적 요인=무기명 거래가 가장 큰 장점이었던 채권 거래에 실명 사용이 의무화됨에 따라 투자의 매력이 사라져 주가 하락과 비슷한 길을 걸을 것으로 전망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채권 유통 시장의 주요 고객인 큰손들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채권도 실명으로 신고해야 하는 등 고민하는 판에 새로운 채권을 더 사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거액 자금의 은신용으로 애용되어온 양도성 예금 증서 (CD)는 실명 거래로 꼬리표가 붙게 돼 추적이 가능해짐에 따라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채권 시장의 이러한 난조가 계속 이어질 경우 증자나 기업 공개에 비해 훨씬 많은 자금을 채권 시장에서 조달해온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더욱 악화되는 것은 물론 자금 시장의 흐름이 꽉 막히는 부작용과 함께 주식·채권의 동방 침체가 겹치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단기 전망=전반적으로 증권 업계에서는 실명제 실시로 채권 시장이 단기적으로는 큰 충격을 받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안정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즉 모든 금융 거래가 실명으로 만 이뤄지게 되면 시중 자금은 숨겨둘 수가 없게 돼 결국 수익성이 높은 상품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정성이 높고 무기명으로 거래가 가능했던 이유로 채권에 투자됐던 은닉성 자금들이 시행 초기에는 대거 빠져 나갈 것으로 보여진다.
또 자금 시장의 혼란으로 채권 시장에도 상당 부분 매수 감소가 있을 것으로 보여 유통 수익률은 당분간 올라가게 될 것으로 보이며 자금이 달린 중소기업들의 회사채 발행도 늘어 이를 시장에서 소화해내야 하는 부담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20년 만기로 조세 시효보다 긴 국민 주택 채권 등은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자금들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증시 침체로 전환 사채는 주식 전환이 줄어 만기에 따른 이자·원금 지급 등의 상환 부담으로 (93년 만기분만 6천억원) 자금 사정의 악화도 예견되는 등 상품별로 명암이 엇갈릴 전망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관 투자가 위주의 거래가 되살아나면 시장은 점차 안정돼 가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통화량이나 물가가 현수준으로 안정돼야 한다는 전제가 항상 뒤따른 점에서 당국의 후속 조치에 따라 채권 시장의 향방도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홍병기 기자>
(실명제 관련 기사 넘쳐 「주가와 경제 환경」 시리즈는 오늘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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