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보완 서둘러야 조기정착(실명경제 시대: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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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호한 조항많아 해석에 혼선/은행­고객 「편법차명」책임공방/자금출처조사등 기준싸고 논란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된 이후 여러가지 제도적인 미비점이 드러나고 있다.
정보가 가장 빠르다는 증권회사들도 낌새를 챌수 없을만큼 보안은 철저했다지만 그만큼 다양한 사례를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탓인지 모호한 조항들로 인해 해석상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은행과 증권회사 창구에서조차 명확한 규정을 몰라 고객과 시비하는 사례가 잦고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자금출처조사 여부에 대한 기준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가명·차명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소지가 많다. 실명제를 실시하기전에 세율을 대폭 낮추는 등의 세제개편을 서둘렀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소유권분쟁 소지
실명제가 실시된 이후 가장 민감하게 나타나는 반응은 가명·차명계좌의 실명전환이다. 가명계좌는 가명(비실명)으로 개설된 통장,차명계좌는 다른사람의 이름을 빌린 통장을 말한다.
정부가 이번 실명제를 실시하면서 차명계좌의 실명전환을 의무화,비실명계좌는 돈이 인출되지 않고 있다. 실명화 의무기간(2개월)이 지난뒤 실명화하는 자금에 대해서는 최고 60%의 과징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남의 이름을 빌린 경우 실명화하기 위해서는 통장의 실질적인 주인이 명의를 빌려준 사람과 함께 창구에 찾아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소유권 등을 둘러싼 분쟁 소지가 적지 않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더구나 다른 사람 몰래 명의를 도용한 도명계좌의 경우 명의자를 찾지 못해 예금을 인출하지 못하거나 명의자를 찾아내도 명의도용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경우 분쟁이 일어난 가능성이 많다. 이때문에 항간에는 「자신의 명의가 도용된 도명계좌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니 금융기관에 가 확인해보라」는 우스갯 소리까지 나돌고 있을 정도다.
금융기관의 가명계좌에 들어있는 돈은 현재 3조여원인데 차명계좌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측은 이같은 분쟁소지에 대해 『실명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유권 문제는 사사로운 것이며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실명화를 계기로 폐지된 금융실명거래법에는 가명계좌 개설을 막지 않았고 그동안 가명계좌의 활용이 금융관행으로 공공연하게 이뤄져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정부의 이같은 입장은 다분히 행정편의주의적 태도라는 지적이다.
특히 금융기관들은 예금 유치경쟁을 벌이면서 차명계좌의 활용을 적극 유도해오기도 했으며 앞으로 실명화 과정에서 금융기관과 고객간 책임공방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부작용이 생겨난 것은 정부가 실명제를 전격 실시하면서 현금인출에 따른 금융시장의 혼란을 막기위해 법개정보다 긴급명령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데 따른 것인데 나중에 금융기관과 고객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법원이 어떻게 해설할는지 주목된다.
○당국 알고도 방치
이밖에 세금우대혜택을 노리고 차명계좌를 활용한 경우 5년간 소급적용,탈루된 이자소득세를 추징할 방침이나 이들중에는 거액전주보다는 중산층과 노인 등 이자소득생활자가 많아 논란이 없지 않다.
세금혜택을 노리고 차명한 것은 잘못이지만 금융기관이 실적경쟁 과정에서 이를 부추긴 측면이 많은데다 재무부와 한국은행 등 금융당국 역시 이같은 편법을 알면서도 저축을 유도하기 위해 방치해온게 사실이다.
조항의 해석을 둘러싼 혼란도 적지않게 발생하고 있다.
본인 명의 통장이라도 이름이 잘못 기재된 경우가 많은데 금융기관 창구에서는 이름 세자중 두자까지만 같으면 되거나 철자가 틀린 것은 실명계좌로 인정해 신고를 받아주고 있는 반면,어떤곳은 엄격하게 적용하는 등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단자업계는 더욱 혼란스럽다.
정부는 가명·차명계좌에 대해 5년간의 이자소득세를 소급해 추징할 방침이나 단자거래의 속성상 초단기 거래가 대부분이고 길어야 1백80일이 최고여서 그동안의 거래를 누적시켜 소득세를 추징할지,아니면 현재 갖고 있는 계좌의 금액과 예치기간에 대해서만 추징할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또한 추징세액이 잔고보다 많을 경우 잔고범위내에서 추징하도록 돼있는데 잔고가 없으면 추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액·잔고에 따라 형평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밖에 사고발생 등으로 보험금을 수령할 경우 이를 예금인출로 볼 것인지의 여부,단자사의 경우 고객서비스 차원에서 양도성 정기예금증서(CD) 등을 현물보관해주고 있는데 이를 예금계좌로 볼지의 여부 등이 불투명하다.
○적극적조치 시급
이같은 조항의 미비와 해석을 둘러싼 혼란은 시행초기에 불가피하게 빚어지는 것이지만 그대로 누적될 경우 실명제의 순조로운 정착에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적극 대응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중앙대 김대식교수는 이에대해 『혁명적 조치에 따르는 부작용은 어쩔수 없으나 실명제 조기정착을 위해 후속조치가 필요하다』며 『예컨대 기존예금의 자금출처를 추적하거나 비실명예금의 실명화 과정에서 지나친 상속·증여세를 물리는 것은 피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길진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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