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시작 알린 증기기관차 기적 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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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18면

디젤 기관차와 전기 기관차에 밀려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기차라고 하면 하얀 연기와 ‘칙칙폭폭’ 소리를 내는 증기기관차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해리 포터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갈 때 타는 기차도 맨 앞에서 증기기관차가 끌고 숲 속을 누비고 하늘을 난다.

주일우의 과학문화 에세이-이미지에 걸린 과학 <9>

증기기관차를 움직이는 증기기관은 원리상으로 보면 아주 간단한 기계장치다. 증기기관은 증기가 가지고 있는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어 물체를 움직인다.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드는 보일러가 붙어 있고 수증기의 팽창과 수축에 따라 피스톤이 움직인다. 바퀴를 움직이려면 피스톤의 직선운동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터빈이 수증기의 팽창과 수축을 원운동으로 바꾼다. 증기기관의 장점은 어떤 연료를 사용하든 수증기만 만들 수 있다면 구동할 수 있다는 것.

증기기관의 원리에 대한 첫 언급은 로마가 번성했던 1세기의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사람 헤론은 증기의 압력이 기계적인 운동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원리가 실생활에 사용되지는 않았고 간단한 도구도 운동의 원리를 보여주는 정도에 그쳤다.

철학의 대상에서 산업 원동력으로

실용적인 증기기관은 16세기 아랍 학자 타키 알-딘이 처음 만들었다. 17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기관이 등장해 절구의 공이를 움직이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는 효율도 낮았고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 정도였다. 예를 들어 데니스 파팽 같은 사람은 증기기관을 당시에 뜨거운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던 완전한 진공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푸는 도구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증기기관은 산업에 응용되면서 세상을 바꾸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개발된 토머스 세이버리와 토머스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처음으로 산업에 응용되었다. 이 기관은 아주 느리고 사람이 지켜보면서 밸브를 따로 여닫아야 했지만 갱도에서 물을 길어내는 데 이용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개발된 제임스 와트의 엔진은 효율도 좋고 끊김 없이 운동해 산업에서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산업사회를 끌고 갈 심장이 마련된 것이다. 현재도 세계에서 만들어내는 전기의 87%가량은 증기기관을 통해 생산된다.

증기기관이 공장을 돌리는 원동력이 되어 대량생산과 소비의 사회를 만들어낸 것도 놀랍지만 탈것들에 증기기관이 실려 인간이 빠른 속도를 경험하게 된 것은 더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 증기기관차가 있다.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고 그 위에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증기기관차 로커모션호가 달린 것은 1825년이었다. 로커모션호는 90t 무게의 객차와 화차를 끌고 시속 16㎞의 속도로 운행했다. 1830년이 넘어서면서 증기기관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장거리 운송의 주요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세계 어디서나 하얀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99년 경인선에 증기기관차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주요한 운송수단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도시의 삶 바꿔놓다

처음 본 증기기관차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편으로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한말에 일본을 방문해 증기기관차를 처음 보고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고 했던 인상기가 그 놀라움을 대변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촌에서 도시로 거처를 옮긴 어떤 시인이 처음 본 기차가 무서워 땅에 바짝 엎드렸다고 한 고백은 기차에게서 느낀 두려움을 극명하게 표현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움도 두려움도 무뎌지고 굉음은 잦아든다. 하지만 증기기관차는 소리 없이 우리 삶의 씨줄과 날줄을 다시 짜는 데 점점 더 깊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우선 사람들의 시간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상행선과 하행선 복선이 없던 시절에 기차가 정확한 시간에 운행하는 것은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했다. 기차는 정해진 시각에 정거장에 도착하고 출발해야 한다. 기차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모두 시계를 맞추어 놓고 그의 운행에 따라 다른 삶의 시간표들을 짜야 했다. 해가 뜨고 지는 데 따라 임의적으로 시간표를 변경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차는 공간적인 구성도 바꾸어 놓았다. 철도는 연속적이지만 기차가 머무르는 역은 띄엄띄엄 놓여 있다. 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산다. 새로운 도시도 만들어지고 철도 바깥에 놓인 공간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차창 밖의 공간과 역에 내려 직접 만나는 공간 사이의 차별은 점점 더 심해진다. 더 나아가 기차는 사회적인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승차권을 타고 모르는 사람들 곁에 앉아 여행을 하면서 성별, 나이, 신분의 차이는 희미해진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시간 여행

시간의 힘은 무섭다. 산업사회를 일구고 시공간과 사회 구조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증기기관차가 이미 현실을 떠나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요즈음은 증기기관차를 보려면 박물관에나 가야 한다. 실제로 움직이는 기차는 더 드물다. 처음 증기기관차를 운행했던 영국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토머스 증기기관차와 그 친구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여러 곳을 들른다. 그곳에 가면 한 번씩 증기기관차가 끄는 객차를 타고 짧은 거리를 여행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남도 곡성에 있는 섬진강 기차 마을에 가면 탈 수 있다.

1998년 전라선 복선화 공사로 곡성에서 압록까지 13.2㎞가 폐선이 되었다. 그곳에 1960년대에 실제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와 같은 형식의 기관차가 끄는 관광용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곡성에서 표를 사서 기차를 타면 섬진강변을 달려 종착역인 가정역까지 가는 데 25분 걸린다. 가정역에서 내려 하이킹이나 래프팅을 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다시 돌아와 곡성역 구내에 마련된 철도 공원에서 한나절 보내면 긴 여름해도 서산을 넘는다.

산업화를 일구었고 근대의 표상이었던 증기기관차에서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아이로니컬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운행되고 있는 기차에서는 볼 수 없는 화차와 화부가 있고 여전히 기계가 아닌 사람의 할 일이 남아있는 증기기관차는 그것이 열었으나 따라가지 못한 현대의 촘촘함 속에선 오히려 막힌 숨을 틔워주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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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역사학,환경학을 공부한 주일우씨는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에 관심이 많은 과학평론가이자 문화공간 ‘사이’의 운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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