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노씨측 배신이냐 업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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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간의 우정과 미움은 다른 사람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많은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두 사람간의 오랜 관계를 지켜본 사람들간에는 「전에 대한 노의 배신」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지만 「전이 노를 너무 무시해 받은 업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6공 때 노 대통령 주변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전 대통령은 80년 권력장악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결정적 공로를 무시 말라』고 반박한다.
노 대통령 쪽에서는 『후계는 5공 출범 제1의 공신으로서 당연치 받을 것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12·12때 9사단 29연대 동원, 5·17과 최규하 대통령 하야과정에서의 공로를 묵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계 자리를 따내기 위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줄 아는가』라며 5공 7년간 2인자 처신의 어려움과 서러움을 들먹이기도 한다. 5공 출범 후 권력의 속성에서 오는1인자와 2인자간의 미묘한 기류가 늘 노 대통령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 하나의 예로 노태우 내무장관 취임과 퇴진과정을 들었다.
83년7월6일 전대통령은 김준성 부총리와 노태우 내무장관을 해임하고 후임에 서석준 전 상공장관·주영복 전 국방장관을 임명했다. 경제총수의 경질, 그리고 내무행정책임자이자 신군부 2인자의 퇴진이 주목을 끌만했으나 청와대는 특별한 배경설명을 하지 않았다.

<9사단29연대 동원>
김 부총리의 사퇴는 대도 조세형이 훔쳤다는 물방울다이아몬드가 구설을 증폭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노 장관의 해임은 분석이 엇갈렸다. 『노 장관이 물먹었다』는 쪽이 있었는가하면, 흠집 나기 쉬운 내무장관에서 서둘러 자진사퇴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내무부주변에서는 노 장관이 퇴임하는 장관치고는 퍽 기분 좋아 보인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는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과 전·노 측근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노 내무장관의 퇴진은 대권을 향한 노 대통령 특유의 몸도 사리기 결정판이었던 것 같다. 그는 82년4월 의령경찰관 총기난동사건으로 물러난 서정화 장관 후임으로 경찰기강확립과 민심수습을 명분으로 취임했다. 그의 기용을 놓고 권력주변에서는 2인자의 학습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즉각 나돌았다. 노 장관은 『무사명·무책임·무소견·무기력 등 4무를 추방하자』는 제법 의욕적인 취임사를 내놓았다. 내무부관리들은 거물급 실세의 등장으로 무언가 변화가 있겠지, 바빠지겠거니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노 내무장관은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특별히 일을 챙기거나 벌일 생각을 않는 것은 물론 시간이 갈수록 처신을 조심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그는 잎사귀 하나(당시 순경) 인사에도 손을 대지 않으려 했고 부내인사는 이춘구 차관에게 아예 맡겨버렸다. 대통령의 관심사항인 시·도지사 인사는 곁에 가지도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강력한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이처럼 허송하는데 대해 차츰 추측이 무성했다. 전대통령이 노 장관을 내무장관에 앉혀놓고 흠집을 내려하는 것 아니냐, 또는 후계자로서 경력관리를 해주는 것이냐는 양론이 있었다.
당시 허화평 정무1수석은 노 내무의 기용에 대해 『의령사건으로 드러난 바와 같이 해이된 경찰의 기강확립을 위해 대장출신을 앉힌 것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 장관 측근들은 「전두환 이후」를 겨냥한 노 장관의 조심스런 예비동작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노 장관은 내무부라는 사고 다발부처의 장관으로 오래 있다가는 불명예 퇴진하기 십상이고, 큰 사건이 터져 5공권력의 민심수습용으로 쓰일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읽은 참모들은「버리는 카드」의 운명이 되기 전에 그만두라고 조언을 했다. 가장 강력하게 권유한 사람 중에는 박철언 청와대비서관도 끼여 있었다.
82년12월 청와대에서 허화평·허삼수 수석이 전대통령에게 쫓겨나가고 83년4월 한일합섬 김근조 이사 폭행치사사건으로 안응모 치안본부장이 불러나자 노 장관은 내무장관을 그만둘 의사를 서서히 표명하기 시작했다. 노 장관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이제 쉴 때가 됐지요』라고 사석에서 종종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전대통령의 반응은 「1년밖에 안했는데…」라는 쪽이었다고 한다, 결국 내무장관 탈출기회는 찾아왔다. 5공 최대 관심사인 올림픽준비를 위해선 여러 사업을 밀어붙여야 하는데 그때 김용식 올림픽조직위원장의 근무 스타일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과 경질건의가 청와대에 여러 차례 올라갔다. 정무2장관시절 올림픽 유치를 위해 뛴 노 장관이 후임으로 발탁됐다. 노 장관이 올림픽조직위로 나가면서 『갇혀있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표정이 달라지더라』는게 당시 청와대비서관 F씨의 기억이다.

<전·노 손잡고 울기도>
결과적으로 노 장관은 상처받기 쉬운 내무장관의 관문을 통과했다. 전 대통령으로선 노 장관의 경력관리를 해준 셈이 됐다. 그렇지만 이 인사는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의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노 장관은 전대통령의 처분이 과연 「호의에서였을까」의심했고 전대통령은 노 장관에 대해 「충직하게 일하지 않고 줄타기처신만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 관계는 믿음과 의심이 혼재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간의 상호경계는 81년7월 노의 보안사령관 예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전대통령은 정호용 장군을 정규11기 대표로 군에 남게 했는데 실은 노 사령관이 더 군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2인자의 처세를 하기엔 「군에 있는게 편하다」는 것이 노의 계산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노의 전에 대한 2중의자세는 일찍부터 습관화 됐다는 것이 당시 주변인사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그러면서도 노 쪽에서는 5공 출범에 「상당한 공헌이 있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80년 5·17조치와 함께 전 보안사령관에게 본격적으로 힘이 쏠릴 때 대권장악의 신념과 확신을 노 사령관이 불어넣고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최대통령으로부터 대권이양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이다. 그해 여름 최대통령으로부터 『중책을 맡아달라』는 말을 들은 뒤 전 사령관은 노 사령관과 여러 가지를 논의했다. 나라를 떠맡는 일을 놓고 밤새 술을 마시며 고민하고 둘이 손을 맞잡고 울기도 했다고 한다.

<최 대통령 하야 설득>
이 과정에서 뛰어든 인물이 김정렬씨(92년 작고·전 국무총리)다. 80년7월말 최 대통령을 만난 김씨가 과연 최대통령의 하야를 권유했는지, 김씨를 끌어들인 것이 노수경 사령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문제에 신군부 핵심 출신 민자당의원 T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최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하는데 전·노 두 사람은 원로들을 앞세웠고 김씨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씨는 최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 있고 4·19당시 국방장관·주미대사를 지내 적임이었지요. 5공 출범 뒤 김씨는 「4·19후 경무대에 불려가 이승만대통령의 하야결심 때 조언을 했고 그리고 최대통령의 하야과정에서도 내가 깊숙이 개입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김씨는「평소에 말없던 노수경 사령관이 최대통령 하야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오더라」고 말해 노사령관이 하야문제와 관련해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인상을 풍기더군요」이 대목의 진위는 최 전 대통령의 증언이 필요하나 그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김씨와 노 사령관이 가까웠다는 흔적은 민정당 창당 대표 영입문제에서 확인된다. T씨의 이어지는 증언.
『당초 민정당의 대표로 김정렬씨를 영입하려했지요. 그런데 김씨가 난색을 표했습니다. 63년 공화당 초대의장을 맡았던 김씨는 당시 김종필씨의 사퇴 등 당 내분으로 2개월 후에 그만두어서인지 정치입문을 달갑잖게 생각했지요. 그는 자기 대신 이재형씨(작고·전국회의장)를 추천했지요. 김씨는 국무총리를 내심, 바라는 것 같았어요. 노 사령관이 이재형씨를 추천한 것으로 돼있지만 그 중간에 김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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