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앞 못보는 '스타크' 게임 승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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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온라인게임 스타크래프트(스타크)를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모니터를 보지 않고 스타크를 한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 없는 말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아무 일도 아닌 듯 하는 사람이 있다.

서울맹학교 고등부 2학년이 되는 이민석(16)군이다. 李군은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우이지만 스타크의 세 종족, 즉 프로토스.테란.저그족(族)을 모두 운영할 만큼 능수능란한 스타크 게이머다. 17일에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게임행사 '블리자드 월드와이드 인비테이셔널'에 참가해 '테란의 황제'로 불리는 프로 게이머 임요환씨와 특별대결을 한다.

李군의 배틀넷(온라인에 접속해 다른 게이머와 대결하는 것) 전적은 26승21패. 프로 게이머와 맞대결할 만큼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모니터를 보지 않고 게임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전적이다.

李군은 마우스를 사용하지 않고 병력을 모두 단축키로 지정해 키보드로만 스타크를 한다.

"단축키가 10개밖에 없어 아쉬워요. 볼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지정해야 하는 게 많거든요. 저는 테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저그가 어떻게 저글링(돌진)하는지 전혀 몰라요. 다만 각 종족이 내는 제각기 다른 소리를 먼저 외운 다음, 전투 중의 비명 소리 등을 듣고 적의 위치와 전세를 파악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유난히 청각이 예민하고 음감이 뛰어났던 만큼 음악만이 그동안 李군의 유일한 취미였다. 음악에 빠져 살던 李군이 스타크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난 건 2000년 가을이다. "맹학교 선배가 스타크를 한다기에 호기심으로 배우겠다고 우겼죠. 그 형은 약시(弱視)라 어느 정도 모니터를 보는 게 가능했지만 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도 같이 하고 싶은 생각에 밤을 새우면서 명령어 버튼을 전부 외웠죠."

남들보다 몇배의 시간을 쏟았다. 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했고, 또 잠시 짬이 나면 게임 방송을 보느라(?) 몇날이고 연거푸 밤을 새웠다.

李군의 어머니 김현주씨는 처음에는 아들의 스타크 정복을 마음 속으로 후원했지만 이제는 아들에게서 스타크를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장차 기독교 대중음악을 하겠다며 평소 피아노와 기타를 즐겨 치고, 학교 밴드부에서 심벌즈 단원으로 활동하는 아들의 건강이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金씨는 "임요환과 스타크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이번 대회가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받고 출전을 허락했다"고 말했다.

李군은 선천적 시각장애우는 아니다. 예정일보다 세상에 일찍 나오는 바람에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게 됐고, 이때 인큐베이터 내 산소 과다 사고로 실명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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