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주의 문학」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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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문학에 거품이 사그라들고 있다. 잘못된 사회·문명, 혹은 자아에 대해 질타하던 허장경세의 거품을 걷고 본연의 언어예술로 귀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문학, 특히 80년대 문학은 독재에 맞서느라 목소리를 높였고 황폐한 산업화 사회와 그 사회에 희생된 인간성·자아를 드러내려 과장된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민시대 진입과 더불어 문학도 이제「대 사회적 역할」을 위해 접어두었던 언어미학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최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 풀들도 길을 떠나는군요 마을 앞 길섶에 나란히 열 지어 서서 어디로들 가고 있을까요/풀들이 올핸 강을 건넜어요 늦은 가을이면 한 발앞에 씨앗을 던져놓고 몸뚱이를 거두어 돌아간 뒤 언 땀 속을 걸어 다음해 봄 그 자리에 싹 틔우고 또 한발 앞에 씨앗을 던져….』
『현대문학』7월호에 실릴 성명진씨(27)의 신인상 추천 당선 시「질경이」의 일부다. 심사를 맡은 시인 김종길·황동규씨는 성씨의 시들을『삶에 대한 따스한 긍정 내지 애정의 눈길이 느껴 져 믿음직스럽다』고 평했다.
우리의 지난 시들은 철저한 부정의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잘못된 제도와 권위로 상징되는「아버지」를 부정하고 나아가 틀, 곧 제도의 모태인「어머니」에게서까지 뛰쳐나간 파괴와 고립무원의 시였다.
그 젊은 시들이 이제「어머니…」라고 부르며 그 품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다혜자./성원에 보답코자/하는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빌린 돈 이자에 치여/만성두통에 시달리는/나의 엄마다 혜자씨는요,/칙칙 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 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여장부지요/기찬,/기-차-안 딸이거든요.』
『창작과 비평』여름호가 발굴해낸 신인 김진완씨(26)의 시「기찬 딸」일부. 기차 속에서 여러 승객들의 도움을 받으며 태어나 이름을「다혜자.」라 지었다는 화자의 어머니를 읊은 시다. 우리말의 해학적 질 위에 우리네 건강한 공동체적 삶을 올려놓고 있는 이 시에 대해창작과 비평 측은 『넉살과 배짱, 그리고 민중적 해학의 생명력에 도달한 독특한 시 세계』라고 추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렇듯 진보적인 문학도 지난 시대 다급했던 민중적 구호나 현실비판의 냉정한 의식에서 벗어나 넉넉하고 웃음이 넘치는 생명의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
『세계의 문학』여름호는 제1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남상순씨(30)의 장편소설 『흰 뱀을 찾아서』를 선정했다.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에 회생된 인물의 삶과 죽음을 반추하고 있는 이 소설은 그러나 섣불리 이념이나 사회과학에 함몰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미덕은 작가 특유의 담백한 어조와 따스한 인간적 시선으로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한 삶을 감동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문장이 어눌한 듯 하면서도 은근히 긴장과 재미를 자아내며 읽히도록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있다』며 「감동」 이라는 문학 본연의 요소를 찾아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제 작품 자체도 지나친 이념이나 감각의 거품을 걷고 있고 진보·순수를 떠나 문단 역시「이제 문학은 언어 예술로 돌아와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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