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숙씨, 고 이만희 감독과 사랑 담은 책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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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1970년대 활발하게 활동했던 배우 문숙(53·사진)씨. 문씨는 최근 고 이만희(1931~75) 영화감독과의 사랑을 털어놓은 산문집 『마지막 한해』(창비)를 출간했다. 74년 영화 오디션 현장에서 처음 만나 75년 이 감독이 갑작스레 숨지기 전까지 약 1년 반 동안의 이야기다.

“30여년을 혼자 간직하고 있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놓고 나니 후련해요.”

문씨는 77년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배우 문숙’은 그 뒤로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화가로서의 삶. 한국말을 잊을 정도로 몰두해 살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그리고 미움과 증오·죄책감이 계속 그를 짓눌렀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난 연인에 대한 미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 것도 몰랐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증오, 그리고 끝내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온통 뒤엉켜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 것이다.

문씨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게 된 것은 2004년 미국 뉴욕에서 이 감독의 유작 ‘삼포 가는 길’을 보고나서였다. 75년 봄 시사회에서 원작자 황석영씨 옆에서 숨죽이며 울음을 참고 본 게 마지막이었던 영화다. 주인공 백화로 출연했던 문씨는 이 작품으로 75년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영화 장면장면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어요. 너무 아파서 피하기만 했던 내 과거를 이제 차분하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죠.”

문씨는 이 감독과의 사랑에 대해 “운명이란 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문씨와 이 감독은 ‘태양 닮은 소녀’의 오디션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문씨는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내 앞에서 한순간에 멈춰버린 듯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심장이 멎는 듯 가슴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됐고, 이 감독의 서울 자양동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스무살 여배우와 마흔 세살 이혼남 감독. 세상은 수군거렸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거리를 걷다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지체없이 번쩍 들어올려 목마를 태워줬던 이 감독, 작은 절에서 올린 둘만의 결혼식, 그날 이 감독이 선물한 금반지….

문씨는 이 감독의 막내딸인 영화배우 이혜영(45)씨와의 추억도 끄집어냈다. 자양동 집에서의 첫날 밤 문씨는 이 감독과 이혜영씨 사이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이 감독의 부탁에 따라 문씨는 이혜영씨와 함께 중학교 입학 준비물도 함께 사러가기도 했다.

“감독님이 쓰러지신 뒤로 이혜영씨를 한번도 보지 못했어요. 며칠 전에 전화했더니 반가워하더라고요. 곧 만나기로 약속했죠.”

문씨는 현재 미국 하와이에서 자연건강음식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는 책 출간과 맞춰 잠깐 들어온 상태. “우리가 나눴던 순수하고 계산없는 사랑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진행 중일것”이라고 말했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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