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32. 개교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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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학교 설립 인가는 1995년 10월에 났으나 그보다 훨씬 이전인 93년 5월 교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일반 고등학교의 수월성 속진교육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직후부터 나는 사실상 학교 설립 준비에 들어갔다. 학교 설립과 운영에 따른 기본 구상은 물론이고 구체적으로 교육과정과 재원 마련, 교육 방법 및 시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94년 11월부터 학교 건물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학교 시설은 전체적으로 전통 한옥의 외형에 현대 건축의 기능성을 접합시키고, 토론식 수업과 수월성 교육에 적합하도록 공간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통문화 교육의 장과 각종 스포츠 시설을 최대한 마련했다. 기숙사는 학생들이 내 집 이상으로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학교는 건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가 학생과 선생님이다. 95년 2월 1일, 우선 교장선생님을 공개 모집했다. 전국에서 무려 1백87명의 교장선생님 후보가 지원했다. 그 중에서 이규철씨를 민족사관고등학교 첫 교장선생님으로 맞았다. 李교장선생님은 교직 경험도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사였고 '새로운 교육'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분이었다.

교장선생님을 먼저 맞아들인 다음 3월 1일에는 1차로 선생님을 공개모집했다. 이 때도 전국에서 수백명의 뛰어난 선생님들이 지원했다. 근무지가 강원도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지원이 있었던 것은 비단 기존 학교 급료의 2~3배나 되는 월급을 약속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교직이 천직이라지만 지금의 학교 교육은 답답하여 숨이 막힐 것 같다. 정말 학교다운 학교에서 혼신을 다하여 가르치고 싶다"는 선생님이 많았다. 그분들 중에서 우선 7명을 뽑아 개교준비위원단을 구성, 개교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어 같은해 8월과 12월에 각각 2차와 3차 공개 모집을 통해 선생님을 추가로 모집했다. 이렇게 하여 28명의 쟁쟁한 교사진이 확보됐다. 96년 개교와 함께 입학 예정인 학생 수가 30명이므로 첫해의 교사 대 학생의 비율은 1대 1이었다. 세계적인 명문고로 알려진 이튼이나 초트메리 고등학교가 6대 1이나 8대 1의 수준이므로 이 부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면 민족사관고등학교가 그 기록을 경신하게 될 것이었다.

선생님을 뽑을 때 서류전형과 실제 수업을 실시한 것은 물론이고 교장선생님과 내가 일일이 만나 면접을 보았다. 해당 학문에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교사의 일차적 자격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명감이다. 가르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뽑았다.

학교 건물을 비롯한 각종 설비공사가 70% 진척되고, 선생님들을 맞아들여 개교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95년 10월 16일 마침내 강원도교육청에서 학교설립 인가가 떨어졌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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