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과잉진압에 유혈 확산”(5·18진상을 캔다: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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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당시 광주시장 구용상씨 보고/대검사용·무차별수색이 주인/유언비어 난무등도 원인/“폭도·불순분자 소행”언급없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대규모 유혈사태로 확산된 가장 큰 원인은 「대검사용」과 「무차별 가택수색」등 공수부대들의 초기 과잉진압이라고 분석한 당시 광주시장이 내무부에 보낸 보고문서가 본사 특별취재반에 입수되었다.
이 보고문서는 당시 정부가 5·18을 「폭도들의 난동」이나 「불순분자들의 소행」으로 공식 발표했지만 80년 당시 정부내에서는 이미 광주사태가 공수특전단의 초기 과잉진압때문에 유혈화된 것으로 결론지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 보고서는 또 89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김일옥 당시 7공수여단 35대대장등 모든 공수여단지휘관들이 『광주사태기간중 대검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 증언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기도 하다.
당시 정부의 「폭도들의 난동때문」이란 공식입장 때문에 13년간이나 빛을 보지 못했던 「광주사태분석」이란 제목의 이 문서는 당시 광주시장이던 구용상 전의원(58·현민자당전남도지부장)이 5·18진압직후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으로 확인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광주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대검을 사용한 유혈진압과 무차별 가택수색등 공수특전단의 초기 과잉진압이라고 못박고 초기 소수병력투입이 과잉진압을 불가피하게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밖의 원인으로 ▲보도부재에 편승한 악성유언비어의 난무 ▲전라도민의 잠재적 피해의식 ▲지역방위태세의 취약성 ▲학생운동의 발상지로서 광주시민들의 기질등을 꼽았다.
본사 특별취재반과 서울에서 만난 구씨는 『이 문서는 진압직후인 80년 6월1일 서울로 올라와 김종환 당시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한 것』이라고 확인하고 당시 『각 행정기관의 보고상황을 직접 분석한 결과 평화롭게 시작된 학생데모가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항쟁으로 확대되고 유혈화 한것은 「불순분자의 침투」나 「김대중씨 연행」보다 초기에 대검까지 사용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주원인이라는 판단을 내렸었다』고 말했다.
5·18이후 도청앞 집단발포 전날인 20일까지 흥분한 시위대를 피하기 위해 모자와 선글라스등으로 위장,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시찰했다는 구씨는 『공수부대들이 시민·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곤봉으로 구타하는등 과잉진압을 직접 목격했고』또 『공수부대원이 직접 시민을 대검으로 찌르는 광경은 보지 못했으나 한손에 곤봉,다른 한손에 대검을 들고 진압하는 모습을 여러번 목격했으며 5월18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대검으로 찔렀다는 보고도 받은바 있다』고 증언했다.
구씨는 『21일 도청앞에서 시위대들에게 자제를 호소하는등 사태수습에 노력했지만 광주시민들이 공수부대의 무리한 진압에 이미 흥분돼 있어 효과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 보고서는 또 사후대책으로 ▲정확한 원인분석 ▲신속한 대응책강구 ▲자율적 회복유도등을 전제로 ▲과잉진압의 시인 및 유감표명 ▲연행자의 조기석방 ▲사상자 가족들에 대한 사후관리 ▲조속한 보상등의 8개항을 건의했는데 대부분이 무시되었었다고 구씨는 말했다.
구씨는 『평화롭게 시작된 데모가 공수특전단의 초기 과잉진압으로 유혈화 되었으나 진압후 솔직한 인정등 뒤처리를 잘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응어리로 남아 역사의 짐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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