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우아하고 매혹적인 ‘고품격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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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기담’.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제목은 겸손하다. 하지만 올 여름 쏟아진 공포영화 중 으뜸이다. 댕강댕강 사지가 잘려나가고 ‘사다코’(머리 푼 귀신)의 비명 없이도 충분히 공포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학과 심리가 있는 고품격 공포영화다. 굳이 공포에 방점을 찍지 않더라도 충분히 매혹적인, 기이한 이야기다.

무대는 1940년대 초 경성의 서양식 병원이다. 며칠 동안 세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옴니버스 구조지만 세 이야기가 서로 촘촘하게 맞물린다.

첫째 이야기. 조용한 성품의 의대 실습생 정남(진구)은 얼굴도 모르는, 일본인 병원장 딸과 정혼한 사이다. 어느 날 시체실 당번을 하던 정남은 여고생 익사체 처리를 맡게 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신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정남은 마침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다음 이야기. 의사 수인(이동규)은 끔찍한 교통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홉 살 소녀 아사코(고주연)의 치료를 맡는다. 사고 후 악몽과 실어증에 시달리는 소녀다.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사고로 형을 잃었던 수인은 묘한 책임감과 함께 치료에 매달린다. 마침내 아사코는 마음의 문을 연다.

세 번째 주인공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부부의사 인영(김보경)과 동원(김태우)이다. 잔혹한 연쇄 살인사건이 잇따르고 인영은 시신 부검을 맡는다. 동원은 밤마다 인영의 행적이 의심스럽다. 마침내 그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감독은 ‘정가 형제’다. 사촌지간인 정식·정범식 형제 감독으로, 인상적인 데뷔작을 내놓았다. 정식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신인답지 않은 기량과 신인다운 패기로 앞날이 기대되는 작품을 빚어냈다. 그만그만한 공포를 쏟아내는 요즘 극장가에서 단연 새로운 전율을 선사했다.

‘기담’은 최근 유행하는 일제침략기 경성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 중 개봉작 1호다. 시대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를 이국적인 미감의 배경으로 잘 활용했다. 정남이 시체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 아사코의 죽은 엄마(지아)가 나타나는 악몽 등은 인상적인 베스트 컷. 영혼결혼, 사랑과 집착, 다중인격 등 공포에 심리적 근원을 제시한 것도 강점이다. 이유 없는 충격요법으로 일관하는 여타 공포물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세 에피소드를 하나로 엮고 일부 반전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이야기의 밀도가 군데군데 떨어지기는 하지만, 우아한 형식미로 공포를 추구한 이 영화의 장점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아사코 역의 아역 고주연의 연기가 당차다. 이미지로 스토리를 대체하는 일부 대목에서는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끼는 관객도 있을 듯하다. 8월 1일 개봉. 15세 관람가.

양성희 기자

주목! 이 장면  미닫이문이 연달아 열리면서 행복한 결혼의 환상을 사계절 이미지로 처리한 장면. 정남의 기이한 결혼을 멋지게 요약한다. 스피디하면서도 몽환적 이미지가 시선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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