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러브스토리 파고 든 공포와 전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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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작가의 이름만 보고 읽기 시작했다면 처음 한두 시간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겠다. “스티븐 킹 답지 않다”고 불평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킹은 역시 킹이다. 호러의 대가가 사랑과 구원을 다루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걸 독자의 뇌리에 강렬하게 심어준다. 작년 말 출간 직후 기자회견에서 스스로 “지금껏 쓴 소설 중 최고”라고 말했을 정도다.

 킹은 특유의 솜씨로 애절한 러브 스토리에 공포와 전율을 꽉꽉 쟁여 놓는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환상과 현실이 어우러지는 특유의 스토리 전개는 그의 팬들에겐 큰 즐거움이다. 이 작품이 그의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는 ‘스티븐 킹 종합선물 세트’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인공 리시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콧의 아내다. 미치광이 팬이 쏜 한국산 권총에 남편을 잃는다. 그 후 2년이 넘어 리시는 스콧의 서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부드러운 러브 스토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스콧의 유고집을 노리는 광적인 팬이 접근하면서 이야기는 팬터지 호러로 치닫는다. 홀로 위험에 처한 리시는 남편이 마치 예견이라도 했듯이 남겨 놓은 실마리들을 발견한다. 이를 따라 다다른 곳이 부야문(booyamoon)이라는 환상 세계다. 스콧에겐 창작의 원천이자 공포의 근원이었던 곳이다. 여기에서 리시는 스콧이 평생 비밀로 해왔던 진실과 마주치고 만다. 킹이 자신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선혈이 낭자하던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등장인물들의 출혈이 상당히 절제된 편이다. 엽기적인 폭행 장면이 군데군데 나오긴 하지만 질릴 정도는 아니다. 다만 분량이 방대하다 보니 군데군데 곁가지가 눈에 띤다. 또 미국 문화와의 거리감 탓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예컨대 리시가 스콧의 유고를 강탈하려는 미치광이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뒤 엉뚱하게 1950년 대 육체파 여배우 자자 가보(번역은 ‘차 차 가보’로 돼있다)의 흉내를 내는 장면이 그렇다. 하지만 밤에 불을 끄고 나서 컴컴한 서재에 뭔가 있는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을 받는다면 제대로 읽은 셈이다. 사실 이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원작에는 미국인도 헷갈릴 만큼 수많은 조어와 방언이 춤을 춘다고 한다. 번역에 꽤나 속을 썩였을 듯싶다. 번역자의 수고와는 별도로 원작의 분위기가 얼마나 충실히 전달됐는지 걱정스럽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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