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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내가 연다] 4. 종교 조성택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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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7일 오전 방학을 맞은 고려대 교정에는 토익.토플 특강을 알리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캠퍼스의 '영어완전정복'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 중 색다른 현수막 하나가 들어왔다.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에 대한 교양강좌가 다음주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세계화와 국수주의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과대학 304호, 철학과 조성택(47) 교수 연구실. 신라 고승 원효(617~686)가 남긴 20여종의 저술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총괄하는 곳이다. 조교수는 올 연말 미국 하와이대에서 출간될 영어판 '원효 전서'(전5권)를 지난 7년간 지휘해왔다. 번역에는 그를 포함한 미국.일본.대만 학자 열두명이 참여했다. 조교수는 원효로부터 세계화의 뜻를 재검토했다.

"원효의 사상을 외국에 전한다는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원효를 세계적 틀에서 재조명한다는 의미가 더 커요. 우리는 지금까지 원효를 한국 불교의 독창성을 상징하는 승려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선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아요. 7세기 중국 불교 전성기에 활동했던 스님 가운데 한명으로 평가합니다. 세계화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알리는 게 다가 아닙니다. 반대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대승기신론소''금강삼매경론' 등 원효의 저작은 대부분 중국 경전에 주석을 단 것이다. 그래서 영역 또한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1차 경전은 물론 원효가 그것을 해석한 방식을 동시에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교수는 이번 번역을 원효를 둘러싼 '신화 벗기기'로 풀이했다.

"그간 원효는 신비적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를 얻고, 요석공주와 결혼해 설총을 낳고, 민중 속에 들어가 설법을 실천한 승려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게 틀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젠 원효를 큰 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원효가 생전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의식했을까요. 당시는 한국이나 중국은 동일한 한자문화권이었습니다. 원효의 저술도 경전에 대한 주석 달기가 한창이었던 당대의 지식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번 영역본은 그런 원효의 실체를 되찾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조교수가 원효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원효를 세계 문화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 파악했다. 요즘 말로 치면 '시대의 담론'에 적극 참여하고, 또 그것을 생산한 학자인 셈이다. "한국 사회에선 요즘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모두 국내 현안에 빠져 눈을 밖으로 돌리지 못합니다."

그는 '영역판 원효'가 한국 불교를 세계 불교의 큰 흐름에 올려놓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유럽의 종교혁명이 성경의 자국어 번역에서 시작됐듯 이번 책이 그간 한반도에 갖혀 있었던 불교가 세계와 함께 호흡하는 종교가 되기를 희망했다.

"1988년 미국 버클리대에 유학을 갔습니다. 지도교수가 그간 읽었던 책 목록을 요구해 보여주었더니 바로 책상 밑으로 버리더군요. 50~60년대 출간된 책만 읽었느냐고 웃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불교는 학문적 입장에서 외국에 많이 뒤졌다는 것이죠."

그는 영어와 한문이 문법이 비슷해 영역판 원효가 한글판보다 오히려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에게도 불교용어를 영어로 설명하면 훨씬 빨리 알아듣습니다. 세상이 달라진 거죠. '한국 불교가 뭐냐, 정말 있는 거냐'고 묻는 외국학자를 볼 때마다 할 일이 많다는 걸 절감합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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