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도 부정몸살-최근 답안지유출사건계기로 본 부정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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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금의 대학입시와 고려, 조선조의 관리등용 시험인 과거는 열기가 지나치고 부정이 횡행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데가 많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실력이 있더라도 출세가 거의 불가능하듯 왕조시대에도 예비시험인 초시나 진사에라도 합격하지 못하면 양반으로 행세할 수 없었던 탓이다. 대리시험, 응시성적 조작에 이어 이번에 터져나온 학력고사 시험답안지 유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법들이 옛 과거사를 들춰보면 모두 선례가 있는 것들이어서 흥미를 끌고 있다.
시험부정 사례는 중국의 과거제도가 처음 도입된 고려조부터 간간이 있어 왔지만 조선중기 이후 특히 심했다.
고려조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관리, 특히 고위관리가 될 수 없게 했던 조선은 과거부정을 엄격히 단속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기강이 느슨해지면서 각종 부정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조에 심했던 과거부정을 역사서는 다음과 같이 유형별로 기록하고 있다.
협서(협서)란 시험장에 책이나 문서를 가지고 가서 보는 커닝이다.
차술(차술)이란 시험장에서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대리시험을 치는 것을 말한다. 글 잘하는 사람이 응시생과 같이 시험장에 들어가거나, 담장 밖에서 대신 써서 시험장에 들여보내거나, 아예 응시생이 시험장을 빠져 나왔다가 들어가는 방법이다.
이것이 심해지자 영조때는 대료와 소료의 합격자에게 발표 다음날 자신이 지은 글귀를 암송시켜 암송하지 못하면 차술한 것으로 간주, 합격을 취소하는 면시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혁제(혁제)란 시험관과 수험생이 짜고 부정합격을 꾀하는 것. 시험관이 수험생에게 문제를 미리 가르쳐주고 집에서 지어오게 하는 방법, 몇 개의 글자를 암표로 정하여 시험지에 쓰게 하는 방법, 사무원을 매수해 답안지의 번호를 시험관에게 알리는 방법 등이다.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는 절과(절료)가 꼽힌다. 채점이 끝난 뒤 합격한 다른 사람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하는 수법으로 남의 합격을 도둑질하는 것이었기에 절과 혹은 적과라고도 하였다.
역서용간(역서용간)이란 잘 아는 관리를 감독관으로 만든 뒤 역서(채점관이 글씨를 보고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도록 붉은 글씨로 답안지를 다시 베끼는 제도)할 때 자기의 답안지를 고치게 하는 수법이다.
헌종 원년에는 역서를 페지했고 10년에는 답안지에서 이름을 봉인해 떼어냈다가 채점후에 합치는 시권할봉을 없애야 했다.
조선후기로 내려와 과거부정이 더욱 심해진 가운데 19세기 홍경래(1780∼1812)는 과거에서 부당하게 떨어진 것을 계기로 난을 꾸미게 되었고, 구한말 나라가 망할 때 순절한 매천 황현도 장원을 부당하게 빼앗기자 일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후기 숙종때에는 과거부정이 지나치게 만연한 나머지 큰 옥사가 일어난 사례가 있다. 숙종 25년에 치른 과거에서 34명을 뽑았으나 발표 3일후에 부시관이 계를 올려 부정을 고발했다.
표만 지었는데 부로써 선발되거나(백일장에서 수필을 냈는데 시조로 당선된 격), 답안지를 먼저 냈는데 뒷 순번을 받거나, 이름과 답안지를 바꿔치기한 사례등이 있다고 폭로한 것이다.
조사결과 응시생 확인에서 채점·관리등 모든 절차에 부정이 개입된 것으로 밝혀졌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시험자체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년이나 걸려 관련자를 모두 처벌,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고위관리들의 연루사실이 밝혀지는등 국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으며 과거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다.
이성무 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장은 이같은 과거부정에 대해『조선시대에 과거는 관리로 등용돼 출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이었기에 결국 과열되고 각종 부정이 스며들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지금의 입시부정도 근본적인 치유책은 사회자체를 학벌만을 위주로 움직이지 않도록 고쳐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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