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살아있는 용기」표본/반나치 바르샤바항쟁 50주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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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독일 친위대 5만6천여명 학살/천5백명 결사항전 10여명 생존
지난 19일은 폴란드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맞서 무력항쟁을 벌인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바르샤바 구게토(유대인 집단거주지)지역에서는 레흐 바웬사 폴란드대통령과 한나 수호츠카총리,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앨 고어 미국부통령,리타 쥐스무트 독일 하원의장 등 내외빈과 전세계에서 온 5천여명 유대인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한 추도식이 거행됐다. 이곳은 지난 70년 고 빌리 브란트 전독일총리가 무릎을 꿇고 나치의 만행에 사죄했던 바로 그 장소다.
1943년 4월19일부터 5월16일까지 나치의 최정예 SS(친위대) 군에 맞서 유대인 1천5백여명이 벌인 이 결사항쟁은 유대인들에게 살아있는 용기의 표본이 되고있다.
28일간의 처절한 항쟁으로 유대인 5만6천65명이 학살됐고,한때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바르샤바 게토는 사라졌다.
1939년 폴란드를 전격침공,제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독일은 1940년초 40만명의 유대인들을 「아리안족의 도시」에서 추방,바르샤바 게토에 집결시켰다.
4평방㎞ 넓이의 게토는 3m 높이의 철조망 담장으로 외부와 차단돼 유대인들의 탈출을 막았으며,한집에 평균 15명이 거주해 전염병과 영양실조 등으로 생지옥을 방불케했다.
나치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42년 7월부터 이들을 유대인 수용소로 옮겨 본격적인 학살을 시작했다. 9월까지 게토거주 40만 유대인중 30만명이 인근 트레블링카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됐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극에 달하게 되자 42년 12월 젊은 유대인들은 결사항전 조직을 결성했다.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가 이끈 이들이 나치에 맞서 무력항쟁을 전개한 그룹이었다. 어차피 죽을바에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다 당당히 죽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권총 70정,수류탄 1백발과 화염병이 무기의 전부였던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SS 8백50명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43년 4월19일 게토로 진입했다. 이들은 유대인의 수류탄과 화염병 기습을 받아 탱크 한대가 불길에 휩싸이자 일단 후퇴했다. 그러나 그후 28일간 SS는 화염방사기 등으로 게토를 초토화 하면서 유대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5월8일 SS가 봉기지도자 아니엘레비치의 벙커를 찾아냈을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자살한 주검이었다. 단지 10여명만이 하수구 등을 통해 탈출에 성공,후일 당시의 참상을 증언했다.
5월16일 이 작전을 마친 SS장군 위르겐 슈트로프는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유대인 5만6천65명을 모두 처형했음. 바르샤바 게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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