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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전소장 '제2엔테베 막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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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장사기사건의 회오리가 한창 몰아치던 82년6월2일 전두환대통령은 청와대에서「의미있는」의전행사를 갖고 있었다. 바로 존 A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의 본국 귀대 신고. 전대통령은 윤성민국방장관· 김윤호합참의장, 그리고 위커주한미국대사가 배석한 가운데 만감어린 표정을 지었다.
전대통령은 의전절차에 따라 위컴의 노고를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내일이면 본국에 귀대할 사람. 그러나 지난 2년7개월, 정확히 말해 79년 12·12 이후 지금까지 그는 얼마나 전대통령의 속을 태웠던가. 실로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대통령이 될 때까지 전대통령은 위컴과 불화의 긴 터널을 지나왔다.
79년 12·12에서 80년 5·17까지 한미간의 긴장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 같은 긴장은 늘 전두환과 위컴의 대결로 나타났다. 전사령관은 심지어 위컴의 주한미군이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싸여 별도의 대책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른바 12·12를 뒤엎는 「역 쿠데타」시나리오는 5공 출범시 알려지지 않은 비사의 한토막으로 숨겨져 왔다.
79년 12월20일께 전보안사령관에게는 충격적인 중요한 첩보가 들어왔다. 「미군, 극비리에 특수부대 한국배치」. 12·12의 후유증이 한· 미군에게 짙게 배어있을 때여서 보안사령부는 잔뜩 긴장했다.
보안사 수뇌부 긴장
첩보의 핵심은 『미특수부대가 한국에 비밀리 공수돼 미8군에 배치됐다는데 그 목표는 무엇인가』였다. 전사령관과 핵심참모들은 이 첩보의 신빙성 파악과 분석에 나섰다. 이들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이 첩보가「정보」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특수부대가 우리 모르게 들어왔다면 그 임무는 대북문제가 아닐 것이다. 목표는 전두환장군에 대한 공격일 가능성이 많다. 아마 그들은 이스라엘군이 엔테베공항을 전격 기습했을 때와 같은 작전을 필지 모른다』
이 같은 분석을 한 전사령관은 정도영보안처장에게 특수부대의 정체를 극비리에 추적, 빠른 시일내에 실체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 정처장은 즉각 용산 미8군과 관련 있는 보안사의 신경조직을 가동했다.
당시 보안사 핵심간부 Z씨의 증언.
『그 첩보는 전사령관이 개인 채널로 입수한 제보였습니다. 전장군의 득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미군측이 특수부대를 불러와 전사령관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죠. 전사령관은 무척 신경쓰는 눈치였어요. 그때 위컴과 전사령관은 12·12 때의 군작전통제권 문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거든요. 비록 첩보의 소스가 신통치 않았더라도 상황이 그랬던 만큼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정도영처장이 지휘한 보안처는 특수부대의 정체파악과 함께 대전복 임무에 들어갔지요』
보안사령부의 보안처는 군의 1개분대라도 완전군장으로 주요초소를 이동할 경우 반드시 체크하는 군의 중추신경 감시망이다.
12·12 때 전사령관의 합수본부측이 장태완수경사령관·정병주특전사령관과 육본 측 움직임을 손금보 듯 알고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보안처의 활약 덕분이었다.
당시 보안사는 육본· 수경사와 연결된 각부대 통신망을 감청, 출동준비 명령이 떨어지는 것을 파악한 뒤 정규 육사출신의 각 지휘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거나 현지 보안부대를 움직여 출동하지 말도록 설득했던 것이다. 때문에 군사기밀의 보호, 군사정보 수집, 대전복 업무, 군관련 대통령 경호 등 업무의 성격으로 인해 보안사 보안처는 고급장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다.
보안사는 첩보의 진위파악과 함께 전사령관에 대한 경호를 한층 강화했다 전사령관은 연희동 집에서 청와대 경호실 경호계장인 동생 경환씨의 청와대 근방 팔리동 집으로 옮겼다
전대통령과 미국의 긴장관계를 좀더 살펴보자
위컴대장은 12·12사태 때 한미연합사령관으로서 자신이 갖고있는 작전통제권이 무시 당한데 계속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인 전사령관의 합수본부측이 북부 노태우소장의 9사단 1개연대를 사전 통보절차 없이 서울로 이동시킨 것은 「변명할 수 없는」한미군사협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연합사는 이름뿐
한국군이 상호작전 통제협정을 지킬 용의가 있느냐는 위컴의 항의는 끈질기고 거셌다. 그는 계속 『이런 식이라면 한미연합사는 해체하는 것이 옳지 않소』『모래 위의 집처럼 연합사 건물은 이름뿐이지 않은가』고 따졌다. 위컴은 자신이 5·16 때 박정희소장에게 당한 매그루더주한미군사령관의 처지가 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위컴의 한국군 창구는 유병신합참의장이었다. 10·26 때 연합사 부사령관이던 유합참의장은 마침 그때 미국에 가있던 위컴을 대신해 박정희대통령 유고사태를 완벽하게 처리했다.
존스 미합참의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대북경고와 비상조치를 취해줄 것을 건의했고, 미국은 신속히 군사적 조처를 취했다.
위컴은 12·12이전인 11월말 유부사령관에게 전두환장군 등 육사11기출신들의 움직임을 지적했다고 한다. 그때 유장군은『그들도 군인인데 행동범주를 지킬 것』이라고 답변한 적이 있었다.
전장군과의 사이에서 유합참의장은 위컴을 이렇게 설득했다.『이제 해결방안을 얘기하자. 전방의 주요방어부대를 원위치로 복귀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9사단의 1개 연대 자리에 교체병력을 만들어 보내면 될 것 아닌가. 예비병력인 20사단 일부를 그 자리에 대체하자. 20사단은 천천치 복귀시켜도 되지 않은가 남양평에 주둔한 20사단은 10·26 때 미군측에 이동을 통보하고 한국군의 작전통제를 받아 서울에 들어왔으며 일부 연대는 서울에 계속 남아 있었다.
유장군의 회고.
『곤혹스러워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위컴에게 이 방법을 제시하자 적지 않게 고맙게 생각하더군요』
10·26에서 12·12까지 정치적 목적으로 동원된 군대는 공수특전단·12사단·9사단의 1개연대 등이다.
전사령관 인정 안해
이중 공수부대는 61년 5·16 후 작전지휘권에 관한 일부 예외조항이 삽입되어 한국군의 통제에 들어왔다. 그 후 특전사령부로 확대 발전되었으며 연합사 작전통제 하에 있은 일이 없었다. 미군이 갖고있는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54년 한미의사록에 따라「양국의 협의 후 합의되는 경우」이를 변경할 수 있다. 이 약정은 78년 한미연합사 창설 후 그대로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미군측은 사전통고만으로 작전통제권을 해제시킬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문제는 9사단 이필섭대령(현합참의장)이 이끈 29연대의 서울 진주였다. 「협의 후 합의」나 사전통보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12·12사태이후 위컴은 전사령관을 의도적으로 만나주지 않았다. 12·12에 대한 미국측의 노여움을 나타내기 위해 글라이스틴대사의 조언에 따라 (미국무부 광주특위답변서) 그는 전사령관의 존재를 무시했던 것이다. 전사령관이 위컴을 처음 만난 것은 두달 뒤인 80년2월14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전사령관은 한국군의 역할에 대한 불가피성, 병영복귀입장을 설명했고 위컴은 문민정부 수립에 대한 미국의 관심, 그리고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준수문제를 거론했다.
79년7월 취임한 위컴은 월남전 때 보병대대장으로 참전해 부상하기도 했으며 육군작전기획참모부장· 합참본부장을 지냈다.
편법· 기습을 주로 하는 특전부대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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