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획일주의(송진혁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골프문제에 관한한 새정부는 마치 콩가루집안 같다. 이 바쁜 시절에 골프가 정부의 중요한 국사처럼 된 것도 가관이지만 골프를 쳐도 좋은지 아닌지,누구는 칠 수 있고 누구는 칠 수 없는지 정부의 말이 헷갈리고 있다.
지난 10일 총리·부총리·관계장관들이 모인 회의에서는 사정이 기업활동의 위축을 가져와서는 안된다며 기업인은 필요하면 주말이든 주중이든 골프를 쳐도 좋다고 했다. 기업인이 골프를 쳐도 좋은지 아닌지를 정부가 고위대책회의까지 열어 가르쳐주는 격이다.
○체통구긴 총리와 대표
이에 앞서 정부측은 추위를 타고 있는 국회의원들에게도 의원이 왜 골프를 못치느냐고,나갔으면 좋겠다고 적극 권장한(?)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사정으로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어보자는 취지였음은 물론이다. 이런 권고에 따라 국회의원은 쳐도 괜찮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김종필민자당대표가 지난 일요일 10여명의 의원을 이끌고 골프장엘 나갔다던가.
그러나 내각차원의 이런 유권해석은 이틀만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국회의원을 포함한 공직자 골프불가가 김영삼대통령의 뜻임이 확인되고 기업인도 「부득이한 경우」외에는 자제하는게 좋다는 청와대측 설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청와대측은 이런 설명을 하면서 『황 총리가 너무 나갔다』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바람에 총리와 골프를 나갔던 김 대표의 얼굴이 머쓱해지고 골프를 재개하려던 기업인이나 국회의원의 발길은 다시 묶이고 만 셈이다.
골프를 둘러싼 이 우스꽝스러운 일련의 얘기는 정부의 사정추진과정에서 발생한 해프닝이라고 가볍게 넘기기에는 여러가지로 뒷맛이 찜찜하다. 우선 골프가 뭐길래 총리나 집권당대표의 체면이 묵사발이 되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금 정부의 사정작업에서 느끼게 되는 경직성·획일성의 분위기다.
사람들이 골프에 추위를 타기 시작한 것은 김 대통령이 재임중 골프를 안치겠다고 한 말이 전해지고부터였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있자 곧 국무회의가 골프자제를 결의하고 전공무원·국영업체·금융계·여당·기업인들에게로 골프장공포증은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명령한 사람은 없었는데 사실상 골프금지령이 되고 만 것이다.
○고질적인 하방경직성
골프뿐 아니라 요즘 공무원·금융계 등에서는 3만원짜리 이상 식사를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그래서 관청마다 구내식당은 초만원이고 주말이면 터져나가던 골프장이 한산하다는 것이다. 다 좋은 일이다. 공무원이 예산으로 흥청망청 때려먹거나 업자와 어울려 골프장을 휘젓고 다니는 일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획일적인 금지나 지시로 과연 개혁이 되고 부정부패가 추방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거 정권들도 출범초엔 으레 서정쇄신이니 사회정화니 하면서 그때마다 단골메뉴로 골프안치기·요정안가기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몇달 반짝하다가 흐지부지되는 것이 예외없는 우리의 경험이었다.
권위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의 하나가 획일주의임은 다 아는 일이다. 개성과 다양성을 무시하고 자율과 창의를 가로막아 사회를 정체·퇴행시키는 것이 획일주의다. 획일주의는 사람들을 면종복배와 이중성의 인물로 타락시킨다. 문민정부의 등장은 이런 획일주의를 배격한다는데도 큰 뜻이 있는 것이다.
김영삼정부 출범이후 짧은 기간에 많은 의미있는 개혁이 추진되고 있음은 정말 박수를 보낼만 하다. 그러나 김 정부가 추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30년간 쌓여온 권위주의 체질의 경직성·획일성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골프를 안치겠다는 대통령의 한마디가 금방 골프금지령이 돼버리는 이 하방경직성이야말로 문민정부가 개혁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대통령이 기침만 해도 아래서는 몸살을 앓고 늑막염이 걸리는 것이 아직도 우리사회의 체질이다. 지난번 식목일에 전 공무원동원령을 내렸다가 취소한 예에서 보듯 하방경직성은 바로 대통령의 코밑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식목일을 노는 날로 보낼게 아니라 정말 나무를 심는 날이 되게 하자는 대통령의 말한마디가 그런 해프닝을 초래한게 아닌가.
○알아서 기는 풍토 곤란
개혁은 획일주의적 강제로 될 일은 아니다. 겁나서 끌려가는 개혁은 성공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여러차례 보았다. 개혁이 옳고 더 합리적이고 더 공정하기에 심복해서 따라가는 그런 개혁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자기밥은 자기가 알아서 먹도록 해야지 정부가 따라다니며 2만9천원짜리는 괜찮고 3만원짜리는 안된다고 일일이 감독하고 지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골프안치고 술집안가고 가격동결·봉급동결하는 모든 일들이 개혁이 무섭고 대통령이 겁나서 겉으로 「알아서 기는」 일이라면 오래가지 못한다. 획일적으로 시켜서 하는 일은 안시키면 금방 안하게 되고 언제까지 시킬 수만도 없는 것이다. 지금 시중에 박 정권때엔 먹으면 일했는데 노정권때엔 먹고도 일을 않고 지금은 안먹고 일도 않는다는 말이 돌아다니는 까닭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수석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