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전 총리 "모든 국민을 대변하겠다는 대선 주자들 생각은 신화일 뿐" 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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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요소는 독선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높은 정치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73.중앙일보 고문.사진)가 우리나라 현실 정치에 대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18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우리공동선 실천연대(이사장 서영훈) 초청 강연에서다.

1988년 통일원 장관으로 관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서울대 교수(정치학)였던 이 전 총리는 '2007 대선의 역사적 의미와 바람직한 선거문화'라는 주제 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권에 쓴소리를 했다.

이 전 총리는 "통일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실업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쉽다. 진보적인 대통령이 나왔다지만 (노 대통령은) 실업문제 해결에 구체적인 연설 한 번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이 올해 들어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과 관련, "2, 3년 전 많은 학자들이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을 때는 반응이 없다가 지금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이 전 총리는 "지금도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애국.평화.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며 "추상적 가치들로 국민을 이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심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선 주자들이 전 국민을 대변하겠다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국가를 위한 국가가 아니라 개인을 위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대선 주자들은 내가 어느 개인과 집단을 대변한다고 말해야 한다. 전 국민을 대변한다는 말은 결국 아무도 대변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 전 총리는 상호 존중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주문했다. "영국의 블레어 총리 퇴임 때 야당 의원들이 블레어의 업적을 찬양하고 노고를 치하하면서 떠나보내는 게 정말 보기 좋았다"며 "생각은 다르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각제 도입 필요성도 거론했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대통령직 사퇴 이외에는 책임질 방법이 마땅히 없는 무책임 대통령제"라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 등 안정적인 나라는 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반면 쿠데타 등 정치가 불안한 남미 국가들이 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 총리는 자신의 과거 정치 활동과 관련해 "정치권에 들어와 이러한 생각을 열심히 말했지만 잘 안 될 것 같아서 빨리 발을 뺐다. 지금은 많은 제자들이 정당별로 흩어져 있어 거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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