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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 그만두면 세집 간다더니…/오홍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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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1월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장공관. 신년하례차 공관을 찾은 기자들은 박준규의장에게 연민의 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박 의장은 바로 14일 전인 91년 12월18일 밤 추곡수매동의안·제주도개발특별법 등 3개 쟁점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뒤 야당측 공세에 밀려 의장직사퇴서를 내고 「하회」를 기다리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통과시한에 쫓겨 「무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7선(당시) 노정치가의 표정은 그러나 담담해 보였다.
○이젠 팔것도 없는데…
서먹해하던 기자들은 그제서야 겨우 『사퇴서가 수리되면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위로섞인 질문을 던졌다. 박 의장은 이때 서슴없이 예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여기(공관)서 나가면 우리 두늙은이가 셋집에서 살아야 할 판인데 걱정이야.』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정치활동은 60년대에 몇십만원 주고 산 잠실 땅콩밭값이 올라 그걸 팔아 그럭저럭 해왔는데,그나마 거덜나 앞으로는 팔 것도 없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다시 침울해졌고 변변하게 갈 곳조차 없다는 백발의 노정객에게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을 표시한 기자까지 있었다.
그의 사퇴서는 그뒤 반려됐고 그는 14대국회에서 또 다시 국회의장이 되었다.
그 박준규의장이 「셋집에서 살아야할 판」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부동산을 지닌 「투기 용의자」로 떠올라 급기야 국회의장직 사퇴 뜻을 밝혔다. 셋방은 커녕 75가구나 된다는 아들의 임대주택을 비롯해 공인인 그와 일가의 부동산 규모는 민초들의 억장을 무너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일대 50필지 14만1천4백99평,서울 구기동 5필지 5천1백28평,경북 달성군 4필지 6만5천3백34평,대구시 범어동 3필지 3천5평-. 이게 그와 그의 가족들이 사들인 땅의 목록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동산 소유자체는 매도할 일이 아니다. 남이 펑펑 놀면서 돈을 물쓰듯 할때 한푼 두푼 아껴모아 목돈이 될만한데다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미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재산형성과정은 투명해야 한다.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그는 이나라 헌정사와 이름을 함께하다시피한 존경받아야할 정치인이었다.
○민초들에 허탈감 심어
좀 나이가 든 사람들은 30대시절의 박준규를 기억한다.
젊은 대학교수였다가 유석 조병옥박사의 비서로 정계에 뛰어들고,이승만에 맞서 대통령에 출마했던 유석이 1960년 2월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별세할때 수행·임종하면서 이땅의 민주화를 다짐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의혈청년이 바로 35세의 박준규였다.
그런 그가,「충신불사이군」을 외치며 목숨을 바친 사육신 박팽년의 직손인 그가,그뒤 어느날 공화당에 들어가 민정당으로,민자당으로 집권당만을 찾아다니며 세명의 대통령을 모시더니 오늘을 맞이했다.
물론 정치적 소신에 따라 여당만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민자당의원들의 재산공개내용을 보면 여당을 한다는 것과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실제로 민자당 각 계파별 재산규모 분석내용을 봐도 5∼6공시절 뜨뜻하게 생활을 한 민정계는 신고액으로만 따져도 1인당 28억원대이고 그 시설 찬밥먹던 민주계는 16억원대였다.
○정치손떼고 낙향할때
박준규의장은 지난해 7월20일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낙향과 여행이라 했다. 그렇다. 그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아울러 공리보다는 사리를 좇기위해 불나방처럼 여당에 모여든 사람이 있다면 미련없이 발길을 돌려야 한다. 지금은 그래야 할 때다.<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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