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허 북한 상대로 게임하듯 협상 즐기는 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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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15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힐 차관보는 18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6자 수석대표 회의 전략을 협의하기 위해 방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김성룡 기자]

북핵 협상의 '조율사'인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15일 오후 서울에 도착했다. 13일부터 이틀간 일본을 방문한 힐 차관보는 한국 방문에 이어 18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릴 6자회담 수석대표 회의에 참석한다.

힐 차관보는 북핵 해결 과정에서 한.중.일은 물론 북한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다. 그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문제를 풀면서 미국 내 강경파로부터 공격을 받아 정치적 위기에 부닥친 적도 있으나 지난달 하순 평양을 깜짝 방문해 6자회담의 추진력을 살려놓았다.

힐 차관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위성락 주미 한국대사관 정무공사는 5월 초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힐이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다. 그가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이상 미국은 북한에 대해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외교로 문제를 풀어갈 것이다"라고 기대했다. BDA 문제로 북핵 해결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 등이 힐 차관보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맹비난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힐은 당시 강경파의 표적이 됐다.

힐이 "연말까지 북핵 해결의 큰 가닥이 잡히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에 없을 것" (5월 4일,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강연 뒤)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기류를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영변 핵 시설을 가동 중단하고 2.13 합의 초기 조치 이행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오기까지 힐의 역할이 컸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2.13 합의는 올 1월 그가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만나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비롯됐다.

그는 '북.미 양자 접촉은 안 된다'는 미 행정부의 금기 사항을 깨고 김 부상을 만났다. 라이스 국무장관의 설득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허락을 얻어낸 다음이었다. BDA 문제 해결 과정에서는 "작은 걸 주고 큰 걸 얻자"는 논리로 재무부의 강경 기조를 누그러뜨렸다. 힐 차관보가 지난달 하순 22시간의 평양 방문 시 '현장 담판'을 통해 북측의 결단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믿을 만한 협상 상대'라는 평가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힐 차관보는 "외교관이라기보다 정치인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북핵 협상 과정을 곧잘 야구 경기나 미식축구 경기에 빗대 설명하곤 한다. 보스턴 레드삭스 팀의 열성 팬인 힐 차관보는 협상을 '게임'으로 보면서 그것을 즐긴다는 말을 듣는다.

힐의 목표는 올 연말까지 북한 핵 시설의 불능화를 완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뜻 낙관론을 펼치지 않는다. 그는 13일 도쿄에서 "앞으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내 경험상 그렇지는 않다"고 말했다. 북한이 예측 불허의 협상 상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힐 차관보가 어떠한 묘수로 북한을 핵 불능화의 길로 유도할지 주목된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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