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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⑪] 아타나시우스의 도바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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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25면

아타나시우스가 도바리 생활을 했어야 했던 아라비아사막에 지금은 ‘6일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1973)에 쓰였던 탱크가 뒹굴고 있다. 이 전쟁으로 ‘캠프데이비드 협정’(1978)이 성립했고 그 협정의 대가로 사다트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나의 가이드는 이 장면을 절대 못 찍게 했다. 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벌벌 떨었다. 군사시설물을 찍을 시 중형을 받는다고 했다. 사다트가 피살된 이래 이집트는 아직도 계엄치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임진권 기자]

성 테오나스 교회가 시리아누스 군대에게 습격받아 피살자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교회당에 쌓이게 되는 그날 밤, 아타나시우스는 대주교의 의자에 앉아서 침착·담대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함과 비명 때문에 예배를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자, 벌벌 떨고 있는 회중에게 ‘이스라엘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는 다윗의 시편 136편을 암송토록 독려했다. 마침내 빗장이 뻐개지고 문이 열리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군인들이 칼을 뽑아들고 성소로 몰려갔고, 제단 주위의 촛불에 반사되어 로마군인들의 갑옷이 번쩍거렸다. 아타나시우스는 사제들의 간청을 뿌리친 채 회중의 마지막 한 사람이 안전하게 나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밤의 어둠과 소란이 그의 탈출을 도왔다. 허둥대는 인파에 밀려 넘어진 채 의식과 행동력을
잃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불굴의 용기를 되찾아 자신의 대가리를 값진 선물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바치려는 아리우스파 앞잡이들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의 수색을 용케 벗어났다. 이때부터 아타나시우스는 모습을 감추고 6년이 넘도록 벽지에 숨어 살았다.

가톨릭만 교회라니?

알렉산드리아의 시내에서 카메라를 들이대자 삼복더위에서도 느깝으로 몸을 감싼 이슬람근본주의자 들이 욕설을 퍼붓는다. 과연 이들이 가톨릭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선언문에 콧방귀라도 뀔 것인가?

이때의 아타나시우스의 삶은 박정희·전두환 치하 민주투사들의 ‘도바리’ 역정과 비슷했다. 황제의 칙령에 따라 전 군민이 그를 추적했고, 산 채로나 죽은 채로 그를 잡아오는 사람에게는 후한 보상금이 지급된다는 방문이 여기저기 나붙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국가의 적이었으며 그를 숨겨주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를 보호해준 것은 체노보스키온 근처, 테베사막에 산재해 있었던 파코미우스의 수도원과 그에 소속된 수도승 집단들이었다. 파코미우스는 이미 저승에 가고 없었지만 사막의 수도승들은 자기들의 헤구멘인 파코미우스와 젊은 날 우정을 맺었던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자기들의 교부로서 받아들였다. 인내심과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들의 엄격한 제도를 준수하는 아타나시우스를 존경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영험스럽게 수용했다. 기도, 금식, 철야예배보다도 그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더 위대한 봉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매진했다. 성스러운 뿔피리로 나팔을 불면 수천 명의 건장하고 신념에 찬 수도승들이 모여 아타나시우스를 보호했다. 그들 대부분이 이 근처의 순박한 농민출신들이었으며 자기들이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밀면서 사형집행인의 팔만 아프게 했다. 어떠한 고문을 통해서도 이 훈련된 수도승들의 자백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신속히 여기저기로 몸을 숨겨 다닐 수 있었다.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는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빈 큰 수조에 숨어 살다가 여자 노예의 배반으로 발각되기 직전에 간신히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기상천외의 은신처에 몸을 숨기기도 했는데, 그곳은 섬세한 미모로 온 도시에서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20세의 소문난 처녀의 집이었다. 몇 년 후에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한밤중에 거의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황망히 문을 두드린 대주교의 모습에 그녀는 경악했다. 대주교는 감싸주는 그녀의 지붕 아래서 거처를 구하라는 하늘의 계시에 인도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하면서 보호해줄 것을 간구했다. 이 신앙심 깊은 처녀는 자기를 믿고 찾아온 이 성스러운 인질을 받아들이고 보호했으며, 용기와 신중함으로 신의 계시에 보답했다. 그녀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즉시 아타나시우스를 그녀의 가장 비밀스러운 체임버로 안내하여 다정한 친구처럼, 그리고 부지런한 하녀처럼 그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그녀는 위험이 계속되는 동안 그에게 책과 음식을 가져다주고, 발을 씻어주고, 서신연락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간의 너무도 친근하고 고독한 교제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도록 매우 적절하게 은폐시켰다. 한 사람은 흠집 없는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성자였고, 한 사람은 열화 같은 위험한 감정을 도발시킬 수 있는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6년간의 박해와 추방생활 중에서 여러 차례 이 아름답고 성실한 동반자를 찾아갔다.”

아타나시우스는 생애를 통하여 이 6년간의 추방생활 외에도 대여섯 차례의 도바리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소신에 따라 아리우스파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며, 콘스탄티우스를 겁약하고 간악한 군주, 음험한 자기 가족의 살인마, 제국의 폭군, 그리고 안티크리스트라고 매도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와의 싸움에서 결국 과로 끝에 병사하고 만다(361년 11월 3일). 아타나시우스는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당당히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하였고, 362년에는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삼위일체론을 정론으로 확립한다. 그리고 기독교회사에서 흔히 “배교자”(Apostate)라고 매도하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종교 간 평등정책으로 일시 또다시 도바리 생활을 해야 했지만, 363년 6월 26일 율리아누스가 사망하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했고, 365년에는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는 발렌스 황제에 의해 다시 추방되었지만 곧 복권되었다. 366년 2월 1일 마지막으로 화려한 입성을 한다. 그리고 다음해 부활절 메시지에서 27서 정경안을 권위롭게 발표하기에 이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337년 만에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습이 최초로 역사의 지평 위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367년 이전에는 기독교에는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구전과 편지와 개별적 전기자료(복음서)들만 산재해 있었을 뿐이다. 이 산재한 문헌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일절 정경과 외경의 구분을 논구할 수 없다. 정경이 없는데 어찌 외경이 있을 수 있으리오?

2007년 7월 10일, 2년 전 새로 취임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이외의 다른 기독교종파는 결함이 있거나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가톨릭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선포함으로써 전 세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기독교 교파 내의 통합과 다양한 인류의 종교들 간의 화합을 도모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합의에 역행하는 해석을 내리면서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를 진정한 교회로 볼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가톨릭 정통주의의 우월성과 분열정책을 표방한 것이다. 가히 소아병 증세(infantile disease)의 발로라 해야 옳다. 생각해보라! 내가 세상에 나서서 “나 도올만이 진정한 학자요, 그 외의 학자는 다 엉터리다”라고 선포한다면 나를 미친놈으로 간주하지 않을 자 어디 있으리오? 우리가 논의해온 초기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고 기독교의 최후보루인 성서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교황이야말로 성서의 근거가 전무하다. 그리고 로마교황 중심의 하이어라키야말로 기독교의 본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 무오류설도 이미 한스 큉(Hans Kung, 1928∼ )과 같은 가톨릭신학자에 의하여 부정된 것이고, 아무런 실제적 효력을 갖지 못하는 우설(愚說)일 뿐이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를 통하여 비가톨릭적인 사고에 대하여 보다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세를 넓혀왔다. 베네딕토 16세는 당초에는 공의회의 입장을 수용했으나 그 이후의 삶의 역정을 통하여 공의회의 결정에 심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교황이 됐다고 해서 그 반세기의 대세를 역행한다는 것은 새로운 아리우스를 양산하는 결과밖에는 초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톨릭 자내(自內)의 분열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교황의 메시지가 아닌 예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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