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되살린 채색칠기 고운 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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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21면

‘한지 천 년, 비단 오백 년’이란 말이 있다. 한지만큼 오래 참고 오래 배려하는 물질이 없다는 뜻이다.
부드럽고 은은할 뿐 아니라 실용적으로도 튼튼해 차세대 첨단소재로도 각광받는 한지가 목공예와 만났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공예가 김경신(52)씨가 선보이는 ‘한지와 옻칠의 만남’은 한지의 너그럽고 끈끈한 힘을 목공예작품에 구현했다. 상감기법의 칠기를 재현하는 한편 한지 본연의 색깔과 질감을 유지할 수 있는 투명칠기도 제작해 신라시대 이후 사라진 채색칠기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독일에 거주하는 김씨는 한지와 금속의 만남을 통해 ‘종이귀금속’이란 장르를 개척한 공예가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대학과 포르츠하임 예술대에서 귀금속 공예 및 조각을 공부했고, 하이델베르크대학 예술사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1998년 독일 공예대상을 수상하는 등 유럽에선 ‘한지를 쓰는 프라우 김’으로 널리 알려졌다. 은은한 오방색의 조화로 동서양의 만남을 추구하는 장신구와 생활용품은 유럽인들에게서도 사랑받고 있다.

김씨가 더욱 주목받은 것은 올 초 전 세계 디자이너 64명이 참가한 장신구전 ‘오마주 아 앙겔라(Hommage a’ Angela)’에 동양인으론 유일하게 초청받으면서다.
베를린 국제디자인센터(IDZ)가 주관한 이 전시회는 제목 그대로 메르켈 독일 총리를 예찬한 잔치. 여성 정치인의 대표주자를 위해 각국의 디자이너들이 목걸이·팔찌·브로치·반지·귀걸이 등을 만들었다. 금속이나 보석을 재료로 쓴 유럽 작가들과 달리 김씨는 한지를 활용한 우아한 브로치로 호평받았다.

김씨는 지난해부터 전통 칠기를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색이 오묘하니 바라볼 때마다 생의 신비가 솟는다”며 자긍심을 내비친다. 낙랑·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까지 성행했던 칠기문화가 재독공예가의 손끝에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전시회는 한국공예문화 진흥원 초청전.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선지(宣紙)와 구별되는 한지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고운 칠기공예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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