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금 해제땐 한국남자 고삐 풀린 망아지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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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오늘(1월5일) 자정이 지난 새벽거리는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려는 시민들로 붐볐다. 휴일도 아닌 이날 밤 거리에 사람들이 몰렸던 것은 통행의 자유를 제약했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첫 밤이었기 때문이다. 36년4개월만의 자유였다.

역사에 기록될 이날밤을 기점으로 밤 12시만 되면 울리던 사이렌과 검정 작업복에 방망이를 찬 방범대원이 자치를 감췄고, 길에 나다니는 사람은 무조건 경찰서로 잡혀가서 다음날 아침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형을 물고 풀려 나오게 되는 일이 없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금은 45년 9월 7일 당시 미군정 포고 1호에 따른 하지 중장의 지시에 따라 경기도지사가 서울·인천일원에 선포한 것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고 난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통금은 전시 등 비상시에 예의적으로 시행됐던 것이 평상시에도 계속 실시되고 있다해서 시행기간 내내 법률및 사회·현실적인 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전두환 정부와 민정당의 정치적 협의로 조기해제가 결정되었다.

물론 '통금'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풀렸음을 기뻐해야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굴곡 많았던 우리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의 선심성 정책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 '통금 해제'를 둘러싼 여론의 향방은 치안유지와 교통문제·보안사범의 증가 등에 대한 우려로 반대의견이 더 많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독자토론'에는 "수면시간에 고성방가·남편들의 늦은 귀가·에너지 소비 증가가 우려된다" "한국인의 절도있는 생활습관을 위해서도 통금제는 꼭 필요하다" "한국의 남자들은 통금 5분전의 귀가가 그들의 특권인양 생각해 오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통금을 해제한다면 고삐 풀린 망아지꼴이 아닐까." 등의 부정적인 독자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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